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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틸레스키-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by 이종한 posted Oct 2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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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1620년)
작가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620)
크기 : 170X 136cm 켄버스 유채
소재지 : 이태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성적인 욕망이 있는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있는 강간이란 성범죄는 오늘날 성폭행으로 불리면서 과거와 다른 인권 유린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문명의 발달은 이런 사고의 전환을 더 재촉하고 있다.

과거는 이런 사건이 있을 때 피해자인 여성을 정숙치 못한 여인으로 치부해서 상처를 배가시켰으나 오늘날은 힘 있는 인간이 약한 인간에게 저지른 폭행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성서에서 나온 것이면서도 성미술의 영역에서 보기엔 좀 생경스러운 것이나 나약한 인간들이 저지르는 범죄가 가져온 불행이라는 것으로부터 신앙을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면에서 통념적인 성화와 또 다른 매력을 주고 있다.

작가는 유명한 화가의 딸로 태어난 사람답게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기질을 전수하여 피렌체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나폴리에 정착해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바로크 화가의 대표인 카라바죠의 작품 경향을 전수하면서도 낭만적으로 작품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작가의 대표작이면서 잔인한 장면을 천진하고 밝고 선명한 색채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의 특징은 한 약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엄청난 폭력의 상처를 신앙으로 승화시킨 자서전적인 의미를 담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작업실을 드나들며 그림을 익히는 과정에서 화가의 길을 걷고자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일하던 조수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게 되었다. 어느 여성에게도 성폭행은 엄청난 상처이나 대단한 감수성을 지닌 작가의 상처는 어느 경우와도 비길 수 없는 독자적인 면이 있었다.

작가는 그 가해자가 아버지의 제자였기에 심리적으로 가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고 이 상처는 그녀의 인생 전체를 괴롭히는 것이 되었다. 이런 상처의 와중에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질곡에서 탈출구를 찾게 되었다.


이 작품의 주제는 구약 유딧기 10장에 나타나고 있는 구국 영웅인 유딧에 대한 것이다. 홀로페레스 장군이 이끄는 앗시리아 군대가 유대 마을을 포위했을 때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상황 앞에 온 국민이 절망과 불안에 빠지게 되었다.

유딧은 과부로서 세상 모든 것과 절연한 상태에서 오직 하느님께만 믿음을 두는 경건한 삶을 살았으나 위기에 놓인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적장을 제거할 결심을 하게 된다. 마치 임진왜란 때 왜장을 유인해서 국가를 구하고자 했던 논개와 비슷한 면이 있다. 다만 유딧은 경건한 과부였고 논개는 기생이라는 신분적 차이는 있으나 의거의 과정은 비슷한 면이 있다. 유딧은 적장을 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인간적인 분노의 동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것임을 성서는 전하고 있다.

"유딧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부르짖으면서 이 모든 말씀을 다 아뢰었다... 유딧은 속에 입고 있던 자루 옷을 벗고 과부 옷도 치웠다. 그리고 물로 몸을 씻고 값비싼 향유를 바른 다음, 머리를 빗고 머리띠를 두르고자 자기 남편 므나쎄가 살아 있을 때에 입던 화사한 옷을 차려 입었다... 이렇게 유딧은 자기를 보는 모든 남자의 눈을 호리려고 한껏 몸치장을 하였다."(유딧서 10: 1-3, 5)

이런 모습으로 적장의 진지에 들어가 자신의 미모로 홀로페르네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고 그를 술에 곯아떨어지게 만든 다음 그의 목을 벰으로서 앗시리아 군대를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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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유딧에게 자신의 정신적 자화상을 남기고자 했다. 자신이 겪어야 했던 성폭행의 상처에서 해방되고픈 그녀의 염원이 악의 화신인 홀로페르네스를 목베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작가는 성폭행의 피해자로서 가해자를 복수하는 차원에서 작품을 처리하지 않고 세상의 악을 제거하는 의인의 역할로서 표현하고 있다. 적장의 목을 베는 유딧의 표정에 어떤 인간적인 분노나 미움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성폭행의 가해자에게 복수함으로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대리만족적인 면이 여기에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뭔가 편치 않는 것을 대면한 인간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유딧을 홀로페르네스라는 죄악의 화신을 제거하는 과정에 나는 죄가 발산하는 역겨운 냄새를 참는 모습으로 그렸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통념적으로 이런 주제가 줄 수 있는 복수의 통쾌함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방향으로 관람객을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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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을,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파괴할 수 있는 무기의 상징과 같은 적장은 어이없게도 한 여인의 쥐인 칼에 의해 인생을 마무리하는 황당한 처지가 되었다.

이 주제를 그린 다른 작가의 많은 작품에서 적장의 목을 베어 들고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었으나 작가는 적장의 목을 베는 모습으로 그린 것은 유딧의 행동은 통념적인 통쾌한 복수의 드라마가 아니라 바로 세상의 악을 제거하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의로운 행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곧 생명이 끊어질 처지에 있는 적장의 부릅뜬 눈 역시 유딧의 유혹에 속았다는 분노와 절망의 표정이 아니라, 자기 힘만을 믿고 악행을 일삼던 자신에게 어이없이 닥친 하느님의 철퇴 앞에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자기 힘을 믿고 못할 짓이 없다는 당당한 자부심을 지녔던 한 악인이 약한 여인의 손에 어이없이 죽어가는 이 모습은 성서의 다음 말씀을 연상케 한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이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로마 11: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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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따르면 유딧이 이 거사를 거행하는 장소는 적장의 침실이었고, 여기에서 유딧은 혼자 적장의 목을 벤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작가는 이 끔찍한 장면을 메시지를 담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표현하기 위해 하녀를 등장시켜 유딧을 돕게 만들었다.

이것은 약한 여자로서 이런 일을 하기에 협조자가 필요하다는 상식적 차원에서 조금도 무리가 없는 설정이며 이것을 통해 작가는 처절한 살인 장면을 통해서도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도록 관람객을 초대하고 있다.

즉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삼각 구도를 설정함으로서 피를 튀기는 끔찍한 살인 현장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세상의 악이 제거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작가의 인위적인 설정은 하느님은 어떤 처지이든 의로운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악은 어떤 처지에서도 멸망한다는 진리를 너무도 아름답고 편안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세상은 항상 폭행으로 얼룩진 역사가 연출되는 현장이었다. 힘이 있는 존재가 힘없는 존재에 가하는 폭행, 남자가 여자에게 가하는 폭행, 그중에도 성폭행은 신체적 상처 뿐 아니라 심리적 상처까지도 주는 최고의 폭행이기에 예나 오늘이나 폭행의 피해자는 어떤 의미이든 이 상처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어하며 이 보상의 통념은 바로 복수였으나 작가는 폭력의 피해자인 자신을 위시해서 모든 피해자들에게 다른 방법으로 폭력의 상처에서 해방되는 지혜를 가르치고자 했다.

성서에서 유딧은 악을 무찌르는 승리의 상징으로서 성모님을 표상하고 있다. 폭력에 상처받는 인간들에게 작가는 "원수를 용사하라"는 성서적 가르침을 너무도 현실적 설득력이 있으면서 쉽고 감미롭게 제시하고 있다.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터이니 너무 상심하거나 분노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이런 연유로 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했지만 살인 현장을 묘사한 이 생경스러운 주제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작가는 이 주제의 비슷한 작품을 여러 개 남겼다. 작가는 여류작가답게 일생에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으나 이 주제의 작품은 가정 폭력, 성폭력이라는 악으로 인해 많은 상처받은 여인들에게 엄청난 위안을 주었다.

요즘 심리학에서 "상처의 치유"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작가가 겪은 성폭행은 한 인간의 몸과 마음을 깡그리 파괴한 것이기에 상처의 치유는 너무도 필요한 것이라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런 오늘의 현실에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너무 새롭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상처받은 영혼을 초대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미술치료라는 것의 필요성과 효과를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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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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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데레사 2010.01.04 12:15:26
    적장의 목을 베는 극적인 순간을 참 멋지게 표현한 그림이네요. 섬광이 번뜩이는듯 순간의 밝은 빛이 세 사람을 일시 정지시킨 것 같아요. 신부님의 훌륭하신 해설을 통해서 유딧의 표정을 다시 보니 많은 여과를 거친 승화된 모습입니다. 눈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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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마리아 2010.01.04 12:15:26
    글제목과 작성자를 명시해서 제 블로그에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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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에디따 2010.01.04 12:15:26
    아마 세상 사람 중에 절반 넘는 사람들이 치유 받아야할 사람들이 아닐까...
    몇 일 전에 TV 보다가 생각했었어요.
    치유 받아야할 사람들이 못받고 살아서...나쁜 일을 하기도 하는거 같단 생각들어서요.
    감기 조심하시구요(저는 감기 걸렸지만요^^) 감사히 읽고 옮겨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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