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카니발과 사순절의 대결 (1559)
작 가: 피터 브뢰헬(1525- 1569)
크 기:목판 유채화 : 118X 164cm
소재지: 오스트리아 비엔나 역사 미술관
작가는 오늘 네델란드를 위시해서 북유럽의 프랑드르 학파의 화가로서 젊은 시절 이탈리아의 여행으로 당시 유럽 화풍에 대한 식견을 키웠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미켈란첼로와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였으며 인간적 표현이 예술 안에서 놀랍도록 승화되던 시기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작가가 활동하던 북유럽은 투박하고 일상적인 서민들의 삶에서 참된 인간 모습을 제시하는 풍조가 유행했다.
이런 면에서 작가는 당시 사회를 대변하는 풍속화가로서 우직한 삶을 살아가는 농부와 난봉꾼, 교묘하게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주제로 상징과 은유를 많이 사용해서 해학적이면서도 생각의 여지를 많이 남기는 작품들을 남겼다.
그가 이렇게 서민들의 삶에서의 애환을 그렸기에 성화 역시 종교적인 주제의 일방적인 강조 보다는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종교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관객들을 인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우선 좌우가 극단의 대조를 이루도록 배치되어 있다
왼쪽은 사순절의 그림자와 같은 카르니발 축제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크리스챤들이 사순절에 가지는 재계의 모습이다.
카니발이란 사순절 전 축제이며 "고기여 안녕 !Carnivalle"라는 뜻의 사순절에 고생이 심할 것이니 , 한판 즐기자는 의미로 시작한 축제가 정착된 것이다.
예술적 표현의 극치에 이른 유명한 베네치아의 가면 축제로부터 브라질에서 광란의 표현으로 유명한 리오의 카니발이 있다.
좋은 동기로 시작된 이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 사순절의 정신을 퇴색시키는 모습은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였고 작가 역시 여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건물의 배치도 왼쪽엔 술집, 오른쪽엔 성당으로 엄연한 구분을 하고 있다.
왼쪽은 술통을 타고 있는 남자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흥청되는 군중들의 모습으로 축제의 실상을 보이고 있다.
그는 칼을 차고 있는 형상으로 보아 푸줏간 주인이며, 술통을 타고 있으니 교회의 가르침인 절제와 반대되는 폭식과 폭음의 상징이다.
복음의 가르침인 절제와 극기와는 거리가 먼 인간적 광란이 교회 축제안에 정착되어 있는 해괴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카니발 축제를 즐기고 교회로 향하고 있는 두 남녀의 등뒤에 불꺼진 등이 들려 있다.
어둠을 거두고 빛으로 나감"이 신앙의 주제라면 이들이 사순절을 핑계삼아 즐긴 축제가 이들의 신앙쇄신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단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안에 신앙 쇄신을 위해 벌리는 많은 것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성 탓에 어느 종교이던 수행이 어떤 형식으로 표현되며 특히 우리 가톨릭 교회는 전례라는 가장 고급 형식을 가진 종교이다.
그러나 이런 전례 역시 그 정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건성으로 실시되다 보면 신앙의 핵심을 표현하지 못하는 공허하고 심하면 위선이 되고 만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왼쪽에 비대한 몸집에 쾌락의 상징인 술통을 타고 거드럼을 피는 카니발의 주인공과 반대로 수도자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있는 버쩍 마른 여인은 자기 정화를 위해 극기와 희생에 몰두하고 있는 사순절의 상징이다.
교회가 제 모습을 잃고 방황하는 순간에도 올곧은 삶을 살아가는 의인들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술집을 배경으로 카니발을 즐기는 사람들의 복장이 화사함과 달리 성당을 중심으로 모인 사순절의 극기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복장은 어둡다
성당 자체가 어두운 색깔로 속죄의 상징을 암시하고 있다.
두 사람의 남자가 아기를 땅에 눕혀두고 구걸을 하는 흰옷을 입은 여인에게 돈을 주고 있는데, 이것은 자선이 크리스챤 삶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보이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 1: 27)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이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 2 : 17)
작가가 활동하던 시대의 화란은 종교적으로 큰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정통을 외치는 가톨릭과 부패된 종교에서 개혁을 외치던 칼빈파에 의해 종교전쟁이 시작되면서 서로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정통이라는 주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나, 작가의 눈에 비친 종교는 복음과 거리가 먼 자기 세력 확장에 연연하는 옹졸한 패거리 집단에 불과 했다.
한마디로 개신교도 가톨릭도 작가에게 있어 복음을 순수하게 사는 집단이 아니었으며 , 카니발도 사순절의 수행 역시 복음의 근본에 접근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견해를 가졌기에 이 작품을 통해 작가의 현실 비판과 함께 나름대로의 종교성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크리스챤 신앙의 진정성은 순수한 열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인데, 가톨릭이던 개신교이던 이것과 거리가 있는 형식의 준수로 포장된 허상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 확인의 핵심에 해당하는 카니발과 사순절의 준수에서도 드러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음 성서 구절을 사람들에게 회상시키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 오너라 .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요엘 2: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