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기행 : 독일 푸거(Fugger) 집안
요즘 중세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중세 서양사 교육은 보수 성향의 개신교 관점의 역사관의 영향을 많이 받아 중세기라고 할 때 한마디로 “암흑시기”라는 말로 못 박았으니, 무지의 극치 상태에서 중세에 대한 여러 오해와 억측을 낳았다.
중세기는 우선 시기적으로 근1000년을 이어오는 것이기에 역사를 알기 위해서라도 중세를 외면할 수 없다.
더욱이 성 프란치스코는 중세인일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중세를 대표하는 인물이기에 성 프란치스코를 사랑하고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중세에 대한 바른 이해는 필수라 볼 수 있다.
중세 연구에 대한 전문가로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역사학 교수였던 크리스토퍼 도슨(Christopher Dawson :1889- 1970)을 들 수 있다.
이분의 중세에 대한 연구 논문인 “유럽의 형성”은 이미 출판되어 있는데(한길사 출판) 그는 이 책에서 중세를 “암흑시기”로 평가하는 근거 없는 편견과 무지와 전혀 다른 관점을 정확한 자료를 바탕삼아 제시하고 있다.
중세기에는 현대적인 시각에서 볼 때 안타까운 사건들이 있었고,이것은 당시 중심 세력이었던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자행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야 말로 인간의 문화와 정신성의 표현에 있어 어느 시기에 비길 수 없이 독자적이며 찬란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몇 년 전 작고하신 예언적 윤리 신학자셨던 베르나르도 헤링(1912- 1998) 신부님은 생애 말년에 “가톨릭 교회와 세상과의 대화”라는 주제의 모임에 참석하셔서 비종교인 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제안을 하셨다.
“세상은 교회를 필요로 하고, 교회는 세상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역사 안에서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교회는 역사 안에서 전 인류를 향해 교회가 공헌했던 좋은 것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교회와 세계와의 대화를 위해선 우리 서로에게 아쉬웠던 부분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여기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기에 교회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것도 정확히 알아야 하지만 중세 교회가 인류에게 공헌한 것에 대해서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앞으로 세상이 밝히지 않은 중세의 밝은 면에 대한 것을 연재코자 한다.
중세기의 아름다움은 고틱 대성당이나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되는 예술 뿐 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열린 신앙,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복음 실천에 과감했던 크리스챤 삶의 아름다운 실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빈민 복지 시설은 1516년 독일 종교개혁의 도시인 아우구스부르그(Augusburg)에서 야곱 푸거(1459-1525 :Jacob Fugger)에 의해 탄생됐다.
푸거(Fugger) 집안의 전성기를 이끈 야콥 푸거(Jakob Fugger)는 당대 유럽 최고의 부자였다.
그의 인생 편력은 “머니 머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라는 정서에 중독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너무도 많은 교훈을 주는 모델이다.
그는 우선 교황청과의 연줄을 만들어 교황청 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대단한 수익을 올렸다. 당시 교황청은 유럽 교회 전체가 보내는 돈이 모이는 곳이었으니, 유럽 어느 왕실 못지않은 재력이 있는 곳이었다.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라는 수치스런 역사를 남긴 방법으로도 유럽 전체의 돈을 긁어 모을 때였으니 바티칸의 돈줄과 연결된 그의 금고는 눈송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에 거치지 않고 국내 투자와 무역에도 손길을 뻗쳤으며 광산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많은 돈을 모았다. 또한 당시 동방과의 교역이 시작됨을 이용해 터키를 경유해서 유럽으로 반입되는 물품을 판매하는 무역으로도 많은 돈을 모았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와 유럽의 여러 황제들과 대주교들까지도 돈이 필요할 때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그는 당시 유럽 사회의 큰 손으로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지를 돈을 바탕으로 달성했다.
이런 억척스럽고 탁월한 방법으로 돈을 모은 다음 단계로 이것을 바탕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일들을 서서히 진행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상인 신분은 상류사회가 되지 못하니 재력을 바탕으로 진출해서 당시 유럽의 실세였던 함스부르크 왕가와 사돈을 맺는 등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착실한 신분 상승을 해서 대성공을 했다.
세상 수준에서 돈과 명예라는 두 토끼를 잡은 처지가 되고나면 여기에 도취되어 희희낙락하다가 루카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인생을 허망하게 마무리하기 쉬운 법이나, 그는 여기에 주저앉지 않고 다시 고귀한 영적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도 카피스트라노의 성 요한으로 시작된 프란치스칸 순회 설교사들의 가르침은 이미 독일에까지 전파되어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에 대한 경각심을 키우고 있던 때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가르침은 단순히 신심 생활 향상의 수준이 아닌 생활의 변화, 특히 경제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한 예로 유명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도의 설교 중 약 20%는 경제생활에 관한 것이었다니 현대에서도 획기적일 것으로 여겨질 만큼 대단히 진보적인 것 이었다.
당시 교회는 돈을 관리하는 은행업을 고리대금으로 치부했고, 이것은 살인처럼 구원받을 수 없는 중죄에 속한 것이라 가르칠 만큼 경제에 대해선 대단한 부정적이며 폐쇄적인 정서가 현존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도 돈에 관한 모든 거래는 고리대금으로 가르칠 때였으며, 프란치스칸과 도미니칸들은 항상 여기에 대한 견해 차이로 치열한 논쟁을 벌일 때였다.
이런 시기에 프란치스칸 개혁자들은 경제에 대한 획기적 개념, 즉 가진 돈을 절약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도운 다는 수준만이 아니라, 돈에 여유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싼 이자로 돈을 빌려 줌으로서, 가난한 사람을 가난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현대 긍정적 의미의 경제이론을 제시하고 이런 획기적 태도가 독일에서도 확산되던 시기였다.
이런 프란치스칸 개혁자들의 현실 문제점을 복음으로 해결한 획기적인 가르침은 중세기 서민사회에 확산되어 Monte di Pieta라는 서민 금고 조직을 형성하게 되었고 , 이것은 시대의 흐름속에 면면히 이어지다가 1960년도 우리 나라가 어려울 때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신용조합"의 효시가 되었다.
남부 독일 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프란치스칸 순회 설교사의 영향을 받은 푸거의 머릿속에는 복지에 대한 예언적 개념이 정립되면서 현대에서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볼 수 있는 수준 높은 복지 개념을 실천으로 옮겨 무주택자들을 위한 임대 주택을 만들었다.
이 주택의 이름이 바로 푸거라이(Fuggerei)이며 1516년 만들었으니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에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빈민 구호 시설이 되었다.
그는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 는 우리의 속담을 재치 있게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무상 임대 수준의 주택이라면 코딱지만한 단칸방 정도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이는 천만의 말씀이다. 이것은 현대적 시각으로도 놀랍게 보일 만큼 격조 높은 복지개념이 실현된 곳이었다.
오늘도 이 시설은 과거의 기념물이 아니라, 중세기와 같이 노인들 중 무주택자들이 살고 있어 기념관이 아닌 그 기능이 살아있는 복지시설의 현장으로 남아있다.
67동의 건물에 147세대가 살고 있는데, 성당과 공동우물이 있으며 당시 수준으로서는 어느 서민 주택과도 비길 수 없이 위생과 복지시설이 갖추어진 시설로 존재하고 있다.
비록 가난해서 여기에 살고 있더라도 집세를 내고 산다는 자존심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푸거 역시 중세 인이기에 고리대금은 곧 지옥불로 이어진다는 교리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해, 입주자들에게 하루 주모경 세 번을 자신을 위해 바쳐 달라는 당부를 했고 이것은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다.
푸거는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상이었다. 돈이 인생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열쇄로 여기며 만족과 자족의 삶을 이어가는 인간상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순회 설교자들의 복음에 바탕을 둔 혁신적인 설교는 푸거에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계기와 함께 당시 사회에 꼭 필요한 복지 개념을 창출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프란치스칸이라는 데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우는 것이다. 프란치스칸이라고 할 때 가난하게 살고 성품은 겸손 단순하면서, 착하기는 하지만 머리가 단단해서(?) 시대착오적인 희극적 실수나 저질러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그런 인간상으로 쉽게 치부할 수 있으나, 이 주택을 통해 보여진 푸거의 결단을 통해 프란치스칸 영성의 실재적 차원이 얼마나 예언적인지를 알게 만들고 있다.
오늘 이 집은 역사적인 이 도시에 있는 여러 명소 중에서 두 번째로 방문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이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보수 개신교도들이 지각없이 지어 만든 “중세 암흑시기” 라는 단어 자체가 얼마나 허구적이며 희극적인지를 알게 된다.
중세기는 프란치스칸 순회 설교사에 의해 고틱 대성당의 색유리보다 더 아름다운 복음적 차원의 복지 실천의 아름다움을 제시했다.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멋진 신세계 ”라는 작품으로 미래학의 지평을 연 영국 철학자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는 앞에 언급한 크리스도퍼 도오손의 [유럽의 형성] 이라는 책의 서평을 다음과 같이 했다.
“암흑시대가 이 책 때문에 어둠을 잃었다”
오늘 600년 전에 세워진 이 주택단지를 보노라면 중세에 시작된 대단히 예언적 복지시설과 함께 이런 예언적 상상력의 바탕을 제공한 프란치스칸 영성의 역동적인 면에 경탄과 함께 자부심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