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가끔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서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기에 부당하다는 느낌으로 서 있으며
하느님의 성도도 아니고 자녀도 아니라는 느낌으로 서 있습니다.
어제 새벽의 경우에도 경당에 들어가 늘 하듯
“주님, 제가 당신 앞에 왔나이다.”로 묵상기도를 시작하는데
“어찌 내가 감히 주님 앞에 나왔나?”하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어두웠고,
이어지는 아침기도 초대송 시편으로
“주님의 산으로 오를 이 누구인고, 거룩한 그곳에 서 있을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가
낭송될 땐 “나는 주님의 산으로 못 오를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첫 번째 시편 50편을 노래할 때는 연속으로 두들겨 맞듯
그리고 제가 마치 다윗이 된 듯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사옵고,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를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참회하는 자의 겸손한 느낌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자비 밖에 있다는 어두운 느낌이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비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고 낭비하여
하느님의 눈 밖에 나고 자비 바깥에 있다는 느낌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모든 성인의 날 두 번째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요한의 이 편지의 어조는 아주 밝습니다.
하느님의 햇빛과 햇볕 가운데 있듯이 밝고 따듯합니다.
성인들은 바로 하느님의 햇빛과 햇볕 가운데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성인들이라고 해서 죄가 없었을까요?
다윗이 성인이라면 죄가 없어서 성인일까요?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감추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숨지 않고
오히려 죄를 들고 하느님께 나아갔기 때문에 성인이고,
자기의 죄만 보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보았기 때문에 성인이고,
죄인일지라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성인이지요.
그래서 탕자의 비유를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작은 아들도 자기가 저지른 죄만 생각할 때
자기를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써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때 잃었을 뿐 여전히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표현은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집 나간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잃었던 아들>, 곧 당신이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한 점입니다.
마치 아이를 잃어버렸을 경우 부모를 졸졸 따라다니지 않고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다 그렇게 됐다고 아이를 탓하지 않고
자신의 부주의로 아이를 잃었다고 탓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은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다고 작은 아들이 생각하는 것도 맞지만
자격지심 때문에 아버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 생각은 잘못이지요.
주님께서는 작은 아들이 비록 스스로 집을 떠났어도
그런 아들을 받아들여줄 뿐 아니라 아들로 여기는 아버지처럼
하느님 사랑도 그러하심을 믿으라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지요.
성도들과 성인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그분의 존재를 믿고, 그분의 능력을 믿는 것도 믿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분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의 구원을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완덕을 이뤄 하느님의 아들이 되지 않고 구원받아 아들 됨을 믿는 겁니다.
그래서 1 독서 묵시록에서 큰 무리가 외치듯 모든 성인의 날인 오늘, 우리도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라고 외칩니다.
구원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 자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까닭은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시기때문입니다.
단, 제가 뉘우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는 건 분명하지만
잘못을 누우치고 그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는
제 자신에게 구원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그분의 사랑을 믿고, ....완덕을 이뤄 하느님의 아들이 되지 않고"
회개하는 사람이 되는 하루 이기를 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