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죽음의 춤 (Taniec smierci)
작 가: 프란체스코 렉스스키(Franciszka Lekszyckiego)
제작년대 : 17세기 후반
크 기 : 켐퍼스 유채
소재지 : 폴란드 크라코바 프란치스코 수도원 대성당
17세기부터 네델란드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체에 “죽음을 묵상하라"는 뜻의 라틴어인 Memento Mori!가 유럽 사회 화풍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주제는 어떤 형상을 통해 신앙의 내용을 전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너무도 명백하고 확실한 미래인 죽음의 묵상을 통해 현세 삶의 가다듬으며 세상이 주는 유혹에 빠짐이 없이 정도(正道)를 걷고자 하는 사람을 도우고자 하는 사목적 배려에서 시작되었다.
네델란드의 개신교들도 자기 신앙의 균형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이 주제의 작품을 많이 이용했다.
개신교 신자들은 성미술을 하나의 우상숭배로 여기기에 예수님이나 성인들의 형상을 그리기를 철저히 금지하고 회피했다.
그러나 화란이 식민지 개척과 무역업으로 사회가 부유해지자, 자연스럽게 신자들에게 부유함의 유혹을 미리 극복하고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책을 모색하면서 정착된 게 바로 이 주제에 접근해서 바니타스(Vanitas)라는 장르의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작가는 가톨릭 고장인 폴랜드 출신으로 특별히 “죽음을 묵상하라.”는 이 주제에 심취해서, 작가 특유의 사유인 죽음과 춤이라는 상반되는 것을 조화시켜 폴란드 여러 곳에 작품을 남겼다.
중앙 부분에 9명의 여성들이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다. 춤은 인생에서 즐거움의 상징이며 또한 행복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삶의 기쁨은 바로 춤을 추는 것에 은유할 수 있는 것이다
재산과 건강과 사회적 성공을 누리는 인간들은 춤이야 말로 바로 자기 삶의 행복을 표현하는 축제가 될 수 있다.
이 무도회에 등장하고 있는 9명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젋고 미모에다 남편을 잘 만나서인지 안정된 생활권에 들어 있다는 것이 그들의 매무새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무도회는 삶의 기쁨 표현만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렇게 인생의 성공을 즐기는 이 무도회에 동반자가 바로 인생의 실상을 알리고 있다.
그들이 손잡고 있는 동반자들은 자기들처럼 미끈하게 잘 생기고 넉넉한 재산으로 그녀들의 인생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귀족이나 젊은 미남자가 아니라 해골들이다.
뼈만 남은 해골들이기에, 그들의 형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해골들은 이 아름다운 귀부인들의 삶과 전혀 다른 어떤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들의 미래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죽음의 실상을 작가 나름대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죽음과 삶을 일직선 상에 놓고 죽음은 인간의 미래가 아니라 삶의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 부인들처럼 인생을 희희낙락하는 그 순간에도 죽음은 이미 공존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으니, 죽음을 생각하라고 인도하고 있다.
보통 인간들의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인 사고로 생각하고 있다. 살아서 즐기는 순간은 죽음과 무관한 것이 바로 인생이기에 죽음에 대한 생각은 무의미한 낭비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부분에서 삶을 즐기는 순간의 인간이 꼭 알아야 할 삶의 실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기에 살아있는 순간에 죽음을 묵상한다는 미래에 대한 준비가 아니라 자기분수의 현실을 바로 표현하는 것임을 알리고 있다.
인간은 그가 어떤 처지에 있던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며, 언젠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너무도 공동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리며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죽음에 대한 묵상이야 말로 가장 인간적인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임을 작가는 알리고 있다.
작가는 당시 유럽 사회에 존재하던 다양한 계층들의 인간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최상의 권력을 누리던 교황으로부터 아무 힘없는 거지에 이르기까지 교황, 추기경, 수도자, 주교, 황제, 왕, 의회의원 ,군인 귀족, 배우, 어린이 광대. 유대인과 무슬림 교도 등 다양한 신분을 등장시켜 죽음 앞에 너무도 평등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도록 암시를 주고 있다.
당시 교황은 크리스찬 국가의 종교 지도자이기 이전 크리스찬 전체를 관할하는 실재적인 군주로 군림하는 한편 여러 나라 정치에 입김을 불어넣으면서 영향을 행사하던 종교 지도자 이전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막강한 군주였다.
땅바닥에 교황의 권력을 상징하는 삼중관과 지팡이가 있는데, 삼중관(Tiara)은 천국과 연옥과 지상의 왕이란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죽음에서 면제된 존재가 아님을 먼저 알리고 있다.
교황은 생전에 자신에게 이런 자기암시를 걸고 있다. “세상에서 아무도 내가 쓰고 있는 이 삼중관에 손을 댈 수 있는 존재는 없기에 나는 결코 너의 춤 초대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으로 초대하는 음악은 지긋지긋하기에 그 음악을 들으면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만에 빠져 있는 교황에게 죽음을 말한다. “너는 나와 결코 춤추고 싶지 않겠지만 언젠가 내 손을 잡고 춤을 춰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추기경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래에 교황이 될 것이란 희망으로 우쭐대거나 교황이 되기 위한 방책을 짜내기에 노심초사하기 보다 너를 붙들고 있는 죽음을 바라본다면 네가 지녀야 할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군인들은 사람의 생명을 차지할 수 있는 무기를 쥐고 있기에 항상 사회에서 유력하고 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역시 다른 사람의 죽일 수 있는 것처럼 자신도 죽어야 할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시편의 다음 구절은 이 군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누구는 수레를 믿고, 누구는 말을 믿고 있어도 우리는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으로 굳세노라.”
거지의 중간에 선 죽음은 거지의 등에 적힌 칙령을 보라고 안내하고 있는데, 그 칙령에는 군인이나 거지나 다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적혀 있다.
세상의 처지에서는 전혀 다른 신분이지만 둘 다 그들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선 같다
거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인생이 불운하다는 비관적인 생각에 인생을 아무 생각없이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에 빠질 수 있으나, 그 역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해골은 거지에게 말한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불운한 너도 죽음의 춤에 초대되어 춤을 춰야 하며 죽음의 순간 너의 모든 불운도 사라지면서 네가 부러워 하던 고관대작들의 처지와 꼭 같은 곳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당시 풍요로운 삶을 누리던 폴란드 사회에서도 오늘처럼 인기배우나 기량이 뛰어난 운동선수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귀족들처럼 안정된 신분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자기들의 능력이나 요행에 의해 많은 돈과 인기를 얻으면서 사회적 신분을 보장받은 사람들이었다.
로마시대에도 검투사는 생명을 건 직업이었지만 오늘 인기 운동선수들처럼 많은 명성과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자기 신분에 걸맞지 않는 여성과 연문을 쌓을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자기 인기나 주위의 선망에 도취되어 우쭐한 가운데 허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들의 모델이었다.
이런 착각속에 망상의 삶을 으스대며 살고 있는 인기 배우에게 죽음은 속삭인다.
배우야, 너는 기량과 인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보내는 선망의 시선에 도취될 수 있지만 언젠가 죽음인 나와 춤을 춰야 할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네가 지금 도취되어 있는 인기인으로서 너의 현실은 하나의 거품에 불과하며 네가 누리는 인기는 너의 뜻과 무관하게 죽음의 날에 너를 떠나게 될 것이다. 아무런 댓가에의 기대도 없이 그냥 자기 흥에 겨워 춤추고 있는 어린이의 삶이 인기에 도취된 너의 삶의 진실한 면모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그러기에 너는 지금 내가 도취되고 있는 인기와 무관하게 죽음으로 허망하게 마무리 해야 할 참 삶의 실상을 관조하길 바란다.
작가는 죽음의 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 분수를 지키며 산 사람은 춤이 끝난 후 천국에 입성하는 행복한 사람임을 전하고 있다.
반면 작가는 삶의 허상에 도취되어 반대편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외면하며 산 어리석은 사람의 미래를 미리 알리고 있다.
“ 불행하여라 죽음의 춤이 끝난 후 지옥 불에 떨어지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