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루카복음의 비유가 지난주일 마태오복음의 비유보다
이 자업자득의 측면을 더 강하게 피력하는 것 같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달란트를 차등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더 불리지 못한 게으른 종은 상을 못 받지만
성실하게 불린 종들은 성과가 다름에도 똑같은 상을 받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이에 비해 루카복음의 비유에서는 똑같이 한 미나를 받지만
각기 열 미나, 다섯 미나, 한 미나의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얘기되고,
상도 열 고을, 다섯 고을을 맡는 것으로 얘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자업자득이라면 은총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기가 뿌린 것 자기가 거두는 거라면 은총은 어찌 되는 겁니까?
은총이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건데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은총 없이 우리가 한 시도 살 수 없고,
은총 없이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아닙니까?
이 믿음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런 말이 되는 것이군요.
미나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 은총을 받는 것은 각자에게 달렸고,
이 은총을 어떻게 쓰고, 얼마나 늘리는 것도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은총이 필요 없다고 교만하게 거절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어떤 사람은 은총이 거저 주시는 사랑이 아니라
대가를 요구하는 부담스러운 거라는 생각에 마지못해 받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기에 어쩌면 모든 것이 달렸습니다.
2년 전 강론을 보니 <생각은 최초의 행위>라는 좋은 표현이 있었습니다.
할 생각이 없으면 후속 행위가 있을 수 없고,
생각에서부터 모든 행위가 시작되기 때문인데
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이어지는 행위가 천양지차로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매우 Positive Thinking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Negative Thinking을 합니다.
무엇을 안 좋다고 생각하면 아예 하지 않을 것이고,
좋지만 안 될 거라고 생각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라고 해서 하면 하더라도 안 되겠지요?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Positive하고 어떤 사람은 Negative할까요?
“아니”와 “안 돼”가 입에 붙은 사람은 왜 그럴까요?
조상 탓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겁니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태어났을 수도 있고,
성장과정에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왜 그 모양이니”, “안 돼”라는 소리를 늘 듣고 자라서 그리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적인 관점에서 그 이유랄까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보지 않고 하느님의 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하려고 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보고, 너를 보면 그것 안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보면 안 될 것 없습니다. 악만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