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시간을 사는 네 부류가 있습니다.
과거를 사는 사람.
미래를 사는 사람.
현재를 사는 사람.
영원을 사는 사람.
과거를 사는 것은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과거에 매여 현재를 살지 못하기에 당연히 바람직한 삶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나이를 먹을수록 살아온 날이 살날보다 많기에,
그리고 새롭게 할 것이 많지 않기에 과거를 살게 되기 쉽습니다.
며칠 전에는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분들을 만났는데도
옛날 얘기만 하고 있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는
우리도 나이 먹었나보다고 하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미래를 사는 것도 과거를 사는 것보다 낫다고 할지 모르지만
현재를 살지 못하는 면에서는 마찬가지로 문제입니다.
미래를 사는 것이 미래지향적으로 사는 것이라면 좋지만
현재를 살지 않고 미래를 사는 것이라면 문제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 나라(천국)가 지금, 여기에는 없고
죽고 난 뒤 저 하늘 어디에 있는 식이라면 잘못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아야 하지만
현재를 사는 것도 그것이 찰나주의라면 역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나중에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지금 쓰고 싶은 것 쓰고,
나중에 몸이 망가지더라도 지금 즐기고 싶은 것 즐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와 정 반대되는 과거를 살아도 안 되지만
미래와 단절된 현재를 살아도 안 됩니다.
현재란 과거, 미래와 단절된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축적인 현재이고 미래로 이어진 현재입니다.
과거와 미래와 단절된 현재를 산다는 것은 시간의 혼란이 아니라
근본과 목표를 상실한, 방향의 혼란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는 현재를 살아야 하는데,
이 과거와 미래, 근본과 목표가 사두가이와 같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두가이의 근본과 사두가이의 목표?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껏해야 근본이 아비이고 목표는 자식입니다.
현세의 부귀영화가 그들의 행복이고,
자기가 죽더라도 후손이 대를 이어 살며 부귀영화를 사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형제가 자식 없이 죽게 될 때
사두가이에게는 현세에서 후사를 잇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현재를 잘 사는 것은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현재를 잘 사는 것은 영원과 잇닿은 현재를 사는 것이고,
영원을 산다는 것은 현재를 영원히 사는 것이며,
근본이 하느님인 삶을 사는 거고 목표도 하느님인 삶을 사는 겁니다.
그리고 영원한 현재를 사는 것은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이며,
하느님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사는 것이고,
하느님 안에서 살다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사는 것이고,
하느님 안에서 살다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라는 말씀,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기에 하느님 안 계시는 과거 현재 미래는 없다는,
다만, 우리에게 실현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것은 현재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씀 드릴 수 있는 미래를 위한
아름다운 추억의 앨범을 만들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