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아름다운 성전에 대해 찬탄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초를 치듯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서 그때가 언제인지,
그때를 어떤 표징으로 알 수 있는지 주님께 묻습니다.
<그때>
예, 우리는 <그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곧 몇 년, 몇 월, 몇 시에 올지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때>의 의미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성전이 허물어지는 때에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너희가 보고 있는 저 것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의 눈에 보이는 것,
그것도 화려하게 보이는 것에 관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시선을 돌려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어도
그것에 우리의 시선이 붙잡히지도 매이지도 말고
능동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시선을 하느님께 돌려야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 허물어지는 때가 사실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허물어버리시는 때이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등장하시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에 시선을 두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에 시선이 붙잡히고 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 중에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들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덩치가 큰 것이 아닙니다.
나이든 이들은 석굴암처럼 위대하고 찬란한 문화 유적들에 시선이 끌리지만
젊은이들은 스마트 폰이라는 아주 작은 기기에 시선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화의 유적도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명의 기기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새로운 기기機器들을 문명의 이기利器라고 했는데
스마트 폰이 이기인지 그저 해로운 기기일 뿐인지 저는 진정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의 강론을 스마트 폰으로 보는 분들도 있을 터인데
이렇게 스마트 폰을 아주 이롭게 이용하는 분들에게는 분명 이기이지만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스마트 폰은 해롭습니다.
장자가 기심機心을 경계하라고 하였지만
스마트 폰은 우리로 하여금 기심을 갖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의존하게 하고,
의존할 뿐 아니라 없으면 불안할 정도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마트 폰이 기심을 갖게 하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시선을 빼앗아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게 문제입니다.
며칠 전 전철을 탔는데 사람들이 모두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느라
아무도 다른 사람들이나 일어나는 일들에 시선을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친구가 손으로 계속 스마트 폰을 두들이기에 보니
어린 아이처럼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은 물론 하느님도 볼 수 없지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하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데 사이비 교주뿐 아니라
이런 기기들에게도 속지 말고 이런 기기들도 따라가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전에 처음으로 사이버공간에 글을 올리면서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서로 통교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 문득,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예수님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성령을 보내주시어 시공간을 초월해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 떠올랐던 때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이기라는 것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있다는 걸 경험했던 기억은,
한 여름에 실내에 에어컨을 키면 실내는 시원하지만 실외기를 통해 그 열기가 외부로 빠져나가
반대로 실내가 시원한 만큼 외부열기가 올라가는 질량 불변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런 기기들에게도 속지 말고 이런 기기들도 따라가지 말아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