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어제 족보에 이어 마태오복음은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 요셉아”하고 불렸을 때 요셉의 느낌은 어땠을까요?
제 생각에 장손들이 보통 느끼듯 요셉도 부담감을 크게 느꼈을 것이고,
개인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살아야 한다는 어떤 운명을 느꼈을 겁니다.
운명감, 운명이라는 느낌.
이것은 정해졌다는 느낌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자기의 운명은 정해졌으며,
그러니 이제 자기에게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다는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해진 운명이 이어지는 천사의 말에 의하면 너무 엄청난 것입니다.
마리아와의 결혼을 깨려고 하였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그 이유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계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상담을 받은 한 사람의 얘기입니다.
원래 임신 계획이 없었는데 어떻게 잘못돼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다가 자기의 꿈을 포기하고 아이를 낳기로 하였는데
출산이 임박해서 보니 낳기로 한 그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유산을 선택한다면 신자로서 다 자란 태아를 갈가리 찢어 죽여야 합니다.
낳게 된다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그 아이의 운명이 너무 불쌍하고,
자기의 운명도 이제 그 아이로 인해 빼도 박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운명 앞에서 그는 아이를 낳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무슨 말을 할 수 없었고 옆에서 기도만 할 수밖에 없었는데
너무도 대단한 선택을 그 어린 자매가 한 것입니다.
그때 제가 얘기해주었습니다.
자매는 임신 계획이 없었는데도 잘못돼서 아이가 임신이 되고,
또 자매가 몸 관리를 잘못해서 아이에게 장애가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아이가 장애아가 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자매의 잘못도 아니라고.
나도 자매도 알 수 없는 자매의 운명이든지 하느님의 뜻일 거라고.
아무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지만
자매가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엄청 두려운 일이었지요.
오늘 복음의 요셉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듣게 되는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랬을 때 겪게 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운명이니 성령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라는 겁니다.
우리 신앙인의 운명은 바로 이런 운명입니다.
내가 원한 것은 물론 아니고
그 누구에 의한 것인지도 알지 못하는,
그래서 그 어디에다가 하소연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분명 하느님 뜻에 따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인격적인 운명입니다.
그래서 이 운명의 두려움도 인격적으로 이겨냅니다.
인생의 모든 두려움을 인격적으로 이겨내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원치 않는 삶의 고통 앞에서 내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서 아~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스스로 부끄러워 했던 때가 떠오름니다.
몰라서 못사는 것 보다 알면서도 아는 만큼 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떠올리니 이런 글을 쓰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싶은 회의가 듭니다.
"인생의 모든 두려움을 인격적으로 이겨내는 것, 이것이 신앙"이고 진정한 삶이라는...
예수님께서 굳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을 상기하면서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나아갈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이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