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요한의 출생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요한이 아니라 즈카르야의 삶에 대해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 복음에 나타나 즈카르야의 삶을 두 줄기로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 줄기는 선택과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선택이라는 것은 여러 형제님들이 다 아시겠지만 여럿 가운데에서 하나를 뽑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뽑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한 삶 속에서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선택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매시간 선택이라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매순간순간의 선택이 모여서 바로 하루를 이루게 되고, 그 하루가 모여 우리의 삶과 인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삶 속에서 선택이라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는 일반인의 선택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는 선택의 중심은 사부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이러한 선택이 모여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삶, 수도자로서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 선택의 주체는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향성을 하느님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지대로, 자기중심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 중심적인 선택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서 종종 우리의 의지대로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고 자기중심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예가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라고 생각합니다. 즈카르야는 평소에는 늘 하느님을 향하고 흠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평소에는 자기 삶의 중심에 늘 하느님이 자리하고 있고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자 노력하던 사람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물음에 대답하는 순간, 즉 선택의 순간,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의심을 품고 자신의 인간적인 조건,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선택으로 인하여 말을 하지 못하고 요한이 출생할 때까지 벙어리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벙어리로 지낸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 즉 대림의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이 시간은 하느님께서 즈카르야에게 벌을 주려고 하신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더욱더 찬미하고 또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즈카르야에게 주어진 시간이었습니다. 비록 복음에는 그 시간동안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나 행위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일고 하는 순간 혀가 풀리고 하느님을 찬미하였다고 전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시간은 요한을 기다린 시간이기도 하였지만 그 뒤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갈망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벙어리로 지낸 그 시간이 즈카르야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은총의 시간이자 하느님의 섭리를 알게 되는 큰 기다림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림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이틀 후면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일입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진심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매순간순간마다 하느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고 하느님을 향한 선택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도 창과 칼을 선택하여 자기의 목표를 이루고자 기사의 길은 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을 향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선택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셨습니다. 앞으로 하느님을 우리의 삶에 중심에 두고 하느님을 향한 길을 선택하여 나아가는 삶이 되도록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