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잠자는 삼왕 (Sleeping Magi :1120- 1135)
작가: 길버트 (Gislebertus : 1120-1135)
재료 : 석회암
소재지 프랑스 오톤의 성 라자로 대성당 ( Cathedral of Saint-Lazare, in Autun(WGA) .
종교가 비상 상태에 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성당과 교회가 텅텅 비고 있다.
기성 종교에 실망을 느끼는 신자들의 이탈 행렬이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 크리스천이 대종인 유럽은 가톨릭 개신교 할 것 없이 교회는 신자들이 줄어들어 썰렁한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네델란드 같은 곳은 신자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폐쇄된 교회가 고급 식당이나 여성의류 판매장으로 변하기도 한다는 서글픈 소식이 들린다
아직 문화적으로 정착되지 않는 미국은 우리나라처럼 생계형 목회 방식에 의해 교회 숫자는 늘어나고 있으나, 실재 신자들은 줄어들고 있어 몇 년 후면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게 되리란 예상을 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만은 이런 현상에서 예외가 되길 바램이 없지 않지만 우리 역시 참담한 현실이다. 시대 착오적인 교리 해석과 복음적인 활기를 차단하기에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는 부정적 차원의 조직과, 교회 지도층이 보이는 실망이 많은 사람들을 교회를 떠나거나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개혁에의 열망이 큰 희망으로 등장하고 있으나 , 이것이 실현되기에는 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자유롭고 신선한 모습 보다 조직 유지 차원의 관리적 성격이 교회 안에 강해지면서 종교가 하늘처럼 시원하지 못하고 지하실처럼 음산하고 밀폐된 인상을 주니 교회가 매력을 상실한 것은 자업자득인지 모른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서 희망을 보이는 현상이 생겼는데, 자발적인 순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제도적 교회는 외면하거나 무관심하면서 성지에서 신선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느 시절 성지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가 순례자가 없어 거미줄을 치고 있던 성지도 자발적으로 신자들이 모이면서 거미줄을 걷고 활기를 띄게 된 곳도 생기고 있다 .
뒤늦게 이런 현상을 확인한 교회 당국은 성지를 찾는 신자들에게 사목적 배려를 시작함으로서 성지순례가 새로운 사목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성지 순례가 세계적인 관심, 가톨릭 신자들 뿐 아니라 타종교인 비종교인들에게 까지 파급된 것은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야고보 콤포스텔라의 순례이다.
카미노(Camino)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산티아고 순례(Camino de Santiago)는 피레네 산맥에 면한 프랑스의 작은 도시 생 장 피드포르에서 시작해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Km의 대여정이다.
근래 이 순례지가 세인들의 폭발적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로(Paulo Coelho)가 쓴 “순례자”라는 작품이 소개되면서이다.
그는 브라질이 독재 군사정권의 지배를 받던 시절 급진적 진보 잡지의 편집장으로서 투옥의 고통을 겪기도 하다가, 운이 열려 세계적인 음반회사의 중역이 되어 생활이 안정권에 들게 되었다.
생활이 안정되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을 필요가 없이 그냥 현상유지로 만족하는 게 인간의 성정이나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1986년 40대 초반에 이미 안정된 위치를 구축한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인생의 진면모를 찾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를 시작하고, 이 순례를 통해 인생이 변한 것을 확인하면서 첫 작품인 순례자를 내놓았다.
이 소설은 보다 진실한 삶을 갈망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면서 순례가 종교적인 차원에서 인류적인 차원으로 승화되어 대중적 관심과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교회가 텅텅 비는 현실에서, 이런 순례에의 폭발적인 열기는 이제 더 이상 종교가 자기들이 만든 신조나 조직에 갇혀있기나 안주해서는 안 되고, 민들레 씨앗처럼 자유롭게 온 세상으로 퍼져야 한다는 희망의 교훈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시작되는 순례 출발지를 지나면서 거치던 성 라자로 대성당에 있는 작품이다.
순례자들은 여러 성당을 거치면서 주로 조각이나 회화로 표현된 성미술을 통해 신앙의 내용을 배우고 자신을 정화하면서 순례를 수행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곤 했다.
특별한 안내인도 없이 동호인 수준의 단체나 개인으로하던 순례 여정에서 이런 작품들은 곧 한편의 감동적인 강론이 되곤 했다.
이 순례 여정에 있는 많은 성당들은 건축학적으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양식으로 전환되는 시기였기에 매우 독창적이며 새로운 시각으로 제작된 성미술이 순례자들에게 자기 정화와 신앙의 열기를 키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은 길버트(1120-1130)라는 석공의 작품으로 이 대성당 정문에 새겨진 최후의 심판 중에 있는 소품이다.
중세기는 흑사병과 기근, 전쟁 등이 연달아 겹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고, 교회의 가르침 역시 지나치게 죄에 대한 공포를 강조함으로서 최후의 심판 조각은 당시 신자들에게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큰 영향을 주던 소재였다.
이 작가는 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에 이 작품은 너무도 인간적인 정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어서 많은 순례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삼왕에 대한 내용은 마태오 복음에 등장하면서 성탄 사화의 한 부분으로 정착되었으나, 이것은 역사적 관점 이전에 의미적 관점에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작가들은 삼왕에 대한 성서 내용을 역사적 사건의 관점으로 받아들여 오늘날 말구유 장식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상상을 도입했으나, 작가는 이 내용을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새롭게 해석 제작함으로서 , 성서적 내용의 핵심을 표현했다.
작가는 동방 박사의 여정에 있었던 한 장면 그것도 신앙 표현과는 전혀 무관한 잠자리를 통해 이 사건이 주는 내면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여행에 지친 삼왕들이 어느 장소에 잠자리를 잡아 쉬면서 내일 순례를 준비하고 있다. 수면이란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이기에, 순례 여정에서도 역시 정지된 것으로 상상하기 쉬우나 작가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겐 삶의 여정 전체가 바로 순례임을 강조하고자 순례 기간의 낭비처럼 여겨지는 잠자리의 삼왕을 등장시켰다.
세 명의 남자가 가지런히 누워 있다. 그들 모두는 하루의 여정에 지친 듯 불편한 잠자리도 마다 않고 깊은 잠에 떨어져 있다.
그들이 내민 머리에 쓰고 있는 관들은 그들이 고귀한 신분임을 알리고 있다. 이들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왕이며 인간적으로 말해서는 현자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들은 인간적으로 인정받는 존재들이기에 아쉬움이 없는 처지였으나 구세주를 만난 다는 일념으로 모든 안정성을 뒤로하고 어렵고 힘든 순례를 하다가 쉬고 있다.
재료가 돌이어서 정확히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이들은 서로 다른 연륜의 사람이며 중간에 있는 사람이 가장 젊은이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적인 경륜이나 관습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손아래 사람이기에 중세 체제에서는 옆의 연장자들을 시중들어야 할 처지이나 양쪽의 왕들은 고귀한 인품의 사람들이기에 이 젊은이를 가운데 뉘어 따뜻하게 배려하고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왕들이 쓴 관에는 불룩한 보석이 박혀 있는데, 이 젊은이는 지체가 낮아서인지 움푹 빈자리가 그의 열등한 처지를 상징하는 듯 하다.
젊고 늠름한 남성형의 천사는 항상 인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던 가브리엘 천사이다.
이 왕들의 순례 여정에도 항상 동반하면서 이들을 안내하고 지켜주고 있다.
새벽 떠날 시간이 되자, 천사는 잠에 떨어진 왕들을 깨우고 있다. 그는 사관학교 교관처럼 하느님의 규율을 엄격히 적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이 가득찬 어머니의 시선으로 왕들을 깨우고 있다.
천사는 셋 중에 가까이 있는 왕을 깨우면서도 그의 고단함을 너무 안쓰러워 하는 표정으로 손끝을 왕에게 대고 있다.
마치 입시 공부에 지친 아들을 깨우는 어머니처럼, 천사는 몹시 미안한 표정과 몸짓을 통해 , 하느님의 모성성을 보이고 있다.
요즘 하느님은 어머니라는 것을 말로는 강조하지만 실재 교회 삶에서 이런 것을 느끼기는 쉽지 않는 현실이다.
교회는 오늘도 아직 많은 부분에서 엄정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법을 한치 착오없이 실시해야 한다는 대단한 사명감에 도취되어 있고,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하는 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 시대착오적인 표현으로 드러나면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들고 있다.
이 천사는 이런 면에서 현대 교회가 배워 보여야 할 하느님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신자들의 애환을 이해하고 마음 아파하면서 어떻게 신자들의 근심을 덜어주고 위로할지를 고심하는 교회의 모습은 이 천사에게서 배울 수 있다.
이 천사의 안스러운 사랑을 확인한 왕이 눈을 뜨고 있다. 이제 그는 다른 두 왕을 깨워 다시 아기 예수님을 향한 순례의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곤히 잠든 왕을 깨우는 천사의 다른 한 손은 왕들이 찾아 떠나야 할 별을 가리키고 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희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 60,1)
어쩌면 "자모이신 성교회" 를 자처하는 교회가 보여야 할 태도를 너무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제 콤포스텔라 순례는 이제 가톨릭 교회의 테두리를 벗어나 진리의 길을 걷고픈 사람,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이 이용하고 있는 열린 순례지가 되었다.
복음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쇄신이라는 관점에서도,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적응의 관점에서도 오늘 교회는 변해야 하고, 이런 관점에서 순례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과 적극적 참여는 참으로 교회에 밝은 미래를 예시하고 있다.
콤포스텔라 순례에 대한 인류 차원의 관심과 열기는 이제 종교가 더 이상 인간을 속박하는 맹신 집단에서 이탈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는 말씀을 만병통치의 효과가 있는 우황청심환으로 여기며 지성적인 사고와 이성적인 태도를 믿음 부족이나 불신앙으로 치부하는 몽매주의와 시대착오적인 제도, 관습과 억압 수단으로서의 종교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현대를 산 독일 루터교 목회자로서 예언적 신학자로 평가되고 있는 폴 틸리히(1886- 1965)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향해 ‘나에게로 오너라’고 초청한 것은 그들을 내가 믿는 새로운 종교로 초청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든 형태의 종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는 새로운 초대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종교의 편협성이 정통으로, 광기가 열심으로 착각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참으로 새겨들어야 할 권고이다.
이 작가는 800년 이전의 중세를 산 석공이었다. 그가 하느님에 대한 참신한 깨달음을 이 작품을 통해 남겼다는 것은 예술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예언성의 단면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