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단식과 관련한 주님의 가르침은 공관복음에 모두 나오는데
오늘 마르코복음은 다른 두 공관복음과 조금 다릅니다.
큰 차이가 아니고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마태오, 루카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자기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치 않는 거냐고 하는 것은
자기들의 것이 더 옳다고 하며 왜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지는 데 비해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따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것이 더 옳은 것인지 알고파서 또는
전통을 깨면서까지 단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파서 묻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바리사이의 태도는 보수주의적 또는 수구적인 태도라면
사람들의 태도는 진보적인 태도이거나 새로운 것에 열려있는 태도입니다.
그래서일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헌 부대였고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새 부대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 포도주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새로운 정신, 새로운 Spirit입니다.
법 중심이 아니라 사랑 중심의 정신이고,
전통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정신입니다.
먼저 사랑 중심의 정신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큰 변화가 있었지요.
단식이나 재계보다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정신이고, 사실 이것이 복음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단식보다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변화이며
새로운 정신이라기보다는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많은 수도자들이 환속했습니다.
엄격한 규율과 기도 생활을 하며 수도원 안에서 안정되게 살던 수도자들이
사랑의 실천을 위해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에,
전과 비교해 위험하고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삶에 적응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에서 적응치 못한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단식이나 편태와 같은 재계 행위가 수도원 일과에서 사라지자
스스로 하는 재계 행위도 그것을 하려는 정신도 약화되었지요.
사실 사랑은 자기희생과 절제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인데
사랑을 위해 스스로 하는 재계와 희생이 사라지면서
사랑 대신 욕망과 편함이 수도자들 안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단식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단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랑을 위한 단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신랑을 위해 단식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신랑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 당신만을 지칭하는 것일까요?
물론 제자들에게 신랑이란 무엇보다도 당신을 말하는 것이겠죠.
제자들과 우리는 다 주님의 신부들이고,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넓게 이해하면 주님만이 우리의 신랑이 아니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우리의 모든 이웃이 다 우리의 신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한 우리라면
주님뿐 아니라 우리 이웃을 위한 인격적인 단식을 해야 하고,
굶주리는 북녘의 형제들을 생각하며 단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격적인 단식을 할 때
우리의 사랑은 단식을 통해 더욱 진실 되고 뜨거워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기도의 말마디보다
말마디에 숨은 동기를 눈여겨 보신다고 하지요.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왜 하고 있는가!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어 있지는 않는지 매 순간 깨여있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사람을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 사람은 안 보이고 일만 보이게 될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을 위한 단식이어야 한다는......인격적인 단식을 할 때
우리의 사랑은 단식을 통해 더욱 진실 되고 뜨거워지게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