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누구나 등불을 등경 위에 놓을 것이고,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함지나 침상 밑에 놓을 사람은 진정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일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것이 등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을 등불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란 어떤 것이고,
등불을 등불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 것입니까?
우선 자신이 등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복음에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사람은 나는 세상의 빛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나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우리 안에 있는 어둠도 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게 어둠이 있는 것은 우리가 빛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니
우리가 빛 안에 있으면 우리 안에 어둠이 전혀 없고
우리가 바로 그 빛을 받아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요한은 등불이고 주님은 빛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빛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을 내는 등불일 수 있고,
빛을 받아 빛을 내는, 곧 반사하는 빛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시는 사랑이 별 것 아니라고 묻어버리지 않고
그 사랑을 불태운다면 우리는 이 사랑의 불태움으로
세상에 빛을 내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안의 사랑을 내 것인 양 우쭐대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내 안의 하느님 사랑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선행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사랑을 주심은 나만 가지고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나눔으로써 우리의 선행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내 안에 가두고
우리의 선행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게 할 때 결과적으로
바로 내가 등불을 덮어버리고 감춰버리는 함지와 침상이 될 것입니다.
다음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등불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무엘하기에 의하면 다윗은 “주님은 저의 등불”(22,29)이라고 하고
시편은 “주님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119,105)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등불을 함지와 침상 밑에 놓는 사람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등불로 삼지 않는 사람이고
또한 사람들의 발을 비추는 등불로 내어주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요즘 인문학 열풍이 불고, 책에서 길을 묻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참으로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세상이 어둡고
가는 길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주님의 복음을 내 발의 등불 삼고 있습니까?
길을 헤매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퍼 나르고 있습니까?
거울이 빛을 비추려면 빛이 있는 곳을 향해 각도를 맞추어야 하듯이
우리의 마음 역시 빛을 향해 있어야 내 안에 빛이 들어와 굴절되어
외부로 향하는 빛이 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고의 전환, 의식의 전환, 즉 무의식의 의식화이며 깨달음이고 알아차림이고
자기 통찰이라고 한다는 걸.....깨달음이라는 것이 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밖히는 것이라는 걸.....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름 잡는 식으로 알아들어서......
마치 신발위로 가려움을 끍는 것처럼 시원치가 않았는데 많은 시간을 헤매다 보니
이제야 저도 조금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빛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을 내는 등불일 수 있고,
빛을 받아 빛을 내는, 곧 반사하는 빛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태양을 향해 도는 해바라기처럼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우두움을 밝혀 주소서.
주여,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아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