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오늘의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아담의 협력자로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을 만들어주셨음을 얘기하는데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수 흙으로 빚어 만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하게 다른 짐승들을 만들어주셨지만
사람은 그들을 알맞은 협력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마치 당신의 실수를 인정하시듯
여자를 협력자로 보내주시니 그제야 아담은 여자를 반기며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하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이 얘기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창세기의 답일 뿐 아니라
사람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한 창세기의 답이기도 합니다.
먼저 사람과 다른 짐승과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창세기에서 식물은 인간과 동물의 먹이이지만
동물은 인간의 먹이가 아니라 협력자이고,
귀한 협력자이기에 사람이 이름을 붙여줍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의 이름을 붙여주면 한 가문의 사람이 됩니다.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러주면 연인이 됩니다.
개나 고양이도 이름을 불러주면 인격적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귀한 협력자로 하느님께서 주셨지만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 짐승은 알맞은 협력자가 아닙니다.
혼자 있는 인간이 보기 좋지 않아 협력자로 주어진 존재이지만
외로움을 달래주는 존재이기는 해도 진정한 협력자는 아닌 것입니다.
요즘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키우는 개를 반려견이라 한다지요.
애완견愛玩犬은 완구玩具처럼, 다시 말해서 어린 아이의 장난감처럼
사랑을 하지만 가지고 놀다 싫증나면 버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려견伴侶犬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 중에는 사람과는 잘 지내지 못하고
개를 자기의 반려자伴侶者 또는 동반자同伴者로 삼는 사람도 있고,
독거노인들처럼 외로워서 개를 사람보다 더 반려자로 삼는 분도 있지요.
그러나 개는 여기까지이고 진정한 협력자는 아닙니다.
왜냐면 협력자란 둘이 힘을 합쳐 뭔가를 이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반려자가 그저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라면
협력자는 옆에 있을 뿐 아니라 함께 무엇을 이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함께 무엇을 이루는 것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함께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그중에서도 부부관계는 바로 이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함께 이루어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랑을 처음 시작한 풋사랑 때는 서로만 원하고 서로만 바라봤다면
사랑의 결실로 자녀를 낳았을 때는 그 자녀를 같이 바라보고
힘을 합쳐 그 자녀를 키우는 것으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가고,
자기 자녀를 다 키우고 나면 더 넓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께 같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혹시 나는 반려동물은 이름을 부르며 끼고 살면서도
정작 사람들과는 등 돌리고 담 쌓고 살지는 않는지.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 창조사업을 함께 이뤄가는 존재이길 바라시는데
우리 인간은 사랑의 협력자가 아니라 이익의 경쟁자로만 살아가지는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