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독서 신명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소유가 되고, 당신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시고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데
거룩한 백성이나 완전한 사람이나 다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존재가 되라고 하시는 뜻은 무엇일까요?
아담과 하와가 교만 때문에 하늘의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오히려 땅에서 나왔으니 땅으로 돌아가 땅이나 일구는 존재가 되었고,
완벽주의 때문에 자기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데 그러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담의 죄나 잘못을 되풀이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지요.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된다 함은
교만 때문에 하느님과 경쟁하고 대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하느님 갈망과 열망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분을 닮고자 갈망하고
사랑하는 분이 원하는 것을 실천코자 열망하잖아요?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고자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사랑을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거룩함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고,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함도 다른 것이 아니라
이 거룩한 하느님만을 바라고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제 우리는 사랑의 소극적인 측면에 대해서 봤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에게 악행을 하지 않는 것, 곧
살인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봤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근근이 남을 해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더 완전하고 적극적인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데
이는 땅에 떨어진 인간의 자존심을 회복하라는 도전이시고,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라는 촉구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완전한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주님께서는 <햇빛 사랑>에 비유하십니다.
차별은 물론 구별도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비추는 것이 햇빛 사랑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빛을 안 주고 부자라고 많이 주거나
반대로 가진 것 없으니까 많이 주고, 많으니까 적게 주지도 않습니다.
똑같이 주지만 집이 추운 가난한 사람은 햇빛이 귀하고 그래서 햇빛을 쬐고
부유한 사람은 굳이 햇빛이 없어도 되니 빛을 쬐지 않는 게 다를 뿐이지요.
하느님 사랑도 그렇고 우리의 사랑도 하느님 사랑을 닮았다면 마찬가집니다.
빈부, 종족, 언어, 피부색을 구별이나 차별하지 않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구별 없음과 차별 없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넘어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고
나에게 잘 해 주는 사람과 잘못하는 사람도 차별 없이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것이 본래 그렇습니다. 은총입니다.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사랑은 거저 주고, 무조건 주는 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도 은총으로 받아 은총으로 주는 것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