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자 치유기사는
공관복음 세 곳에서 모두 다루고 있다.
마태오는 지붕까지 열어제치고 중풍환자를 예수앞에 내렸다는
이야기는 빼고 있지만,
세 복음서 모두
죄까지도 사해주시는 예수의 권능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는 내용은
중풍병자와 그의 절친한 동료 4명의 이야기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숫자가 몇명일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수도생활 안에서 공동체라 한다면
3명이상을 이야기하고
보통은 전통적으로 4명은 적어도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 자신의 수도생활 체험 안에서 본다면
가능하면 5명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정상적인 구조 안에서는 4명이면 되겠지만
비상사태 등을 염두에 둔다면 5명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오늘 복음에 등장하듯이
한 구성원이 중풍에 걸렸다든가,
불가피하게 쉬어야만 하는 경우라든가를 생각한다면 필수적이다.
나는 오늘 중풍병자의 행복을 한번 생각해 본다.
그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다른 구성원들에게 짐 아닌 짐이 됨을 늘 가슴아프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내가 빨리 죽는 것이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삶의 의미가 없다고도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란 말인가?
그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신바람나게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작스런 중풍으로 인해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 깊은 낙심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
중풍병자는 참으로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삶이 참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식구들이(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이 못난 환자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이 환자를 치유코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상한 노력 덕분에
그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고
다시 성한 몸으로 걸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함께 살 때는
이런 모습, 저런 모습 때문에
맘에 안드는 것도 많았었는데...
이 형제들이 나를 그토록 사랑했었다니...
그들 덕분에 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 덕분에 나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니
오, 형제들이여, 너무도 고맙구나, 정말 고맙구나...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는구나...
가정공동체도 수도공동체도
적어도 5명은 되어야 한다.
우리네 가정이 핵가족화하면서
이렇게 서로 어렵고 힘들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른 구성원들이 힘써줌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도 많이 박탈되었다.
식구가 적다 보니
그 중 누가 환자(영, 육)가 되어도
부축해줄 식구들이 없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 가정 문제의 발단이 아닐까?
가끔
병든 시어머니를 수십년간 모시고 있는 며느리의 고백을 듣기도 한다.
남편이 있고 아이들이 있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이 들어보인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부축한다면
그 할머니는 오늘 중풍병자가 누리는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정은 참으로 건강한 성가정이 될 것이다.
우리네 가정생활, 수도생활에는
항상 영육간에 힘드는 식구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식구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가 그 환자일 수도 있다면
나는 다른 형제식구들의 도움으로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형제식구들의 도움을 겸손되이 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건강한 식구들은
환자식구를 귀찮아해서는 안된다.
그 환자식구를 위해서는
힘을 모아(이것이 중요하다)
최선을 다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그를 주님 앞에까지 데려놓는 일을 해야한다.
우리는 미약하지만
주님께서는 기적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 식구들을 주신 이유,
우리 형제들을 함께 살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 가끔은
주님께서
우리 가정과 수도공동체에
이렇게 영육간에 아픈 형제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형제애, 가족애는
주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우리 가족들을 위해, 우리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그런 가족과 형제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음으로 고마움을 표시하자.
공관복음 세 곳에서 모두 다루고 있다.
마태오는 지붕까지 열어제치고 중풍환자를 예수앞에 내렸다는
이야기는 빼고 있지만,
세 복음서 모두
죄까지도 사해주시는 예수의 권능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는 내용은
중풍병자와 그의 절친한 동료 4명의 이야기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숫자가 몇명일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수도생활 안에서 공동체라 한다면
3명이상을 이야기하고
보통은 전통적으로 4명은 적어도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 자신의 수도생활 체험 안에서 본다면
가능하면 5명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정상적인 구조 안에서는 4명이면 되겠지만
비상사태 등을 염두에 둔다면 5명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오늘 복음에 등장하듯이
한 구성원이 중풍에 걸렸다든가,
불가피하게 쉬어야만 하는 경우라든가를 생각한다면 필수적이다.
나는 오늘 중풍병자의 행복을 한번 생각해 본다.
그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다른 구성원들에게 짐 아닌 짐이 됨을 늘 가슴아프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내가 빨리 죽는 것이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삶의 의미가 없다고도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란 말인가?
그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신바람나게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작스런 중풍으로 인해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 깊은 낙심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
중풍병자는 참으로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삶이 참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식구들이(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이 못난 환자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이 환자를 치유코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상한 노력 덕분에
그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고
다시 성한 몸으로 걸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함께 살 때는
이런 모습, 저런 모습 때문에
맘에 안드는 것도 많았었는데...
이 형제들이 나를 그토록 사랑했었다니...
그들 덕분에 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 덕분에 나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니
오, 형제들이여, 너무도 고맙구나, 정말 고맙구나...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는구나...
가정공동체도 수도공동체도
적어도 5명은 되어야 한다.
우리네 가정이 핵가족화하면서
이렇게 서로 어렵고 힘들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른 구성원들이 힘써줌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도 많이 박탈되었다.
식구가 적다 보니
그 중 누가 환자(영, 육)가 되어도
부축해줄 식구들이 없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 가정 문제의 발단이 아닐까?
가끔
병든 시어머니를 수십년간 모시고 있는 며느리의 고백을 듣기도 한다.
남편이 있고 아이들이 있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이 들어보인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부축한다면
그 할머니는 오늘 중풍병자가 누리는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정은 참으로 건강한 성가정이 될 것이다.
우리네 가정생활, 수도생활에는
항상 영육간에 힘드는 식구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식구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가 그 환자일 수도 있다면
나는 다른 형제식구들의 도움으로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형제식구들의 도움을 겸손되이 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건강한 식구들은
환자식구를 귀찮아해서는 안된다.
그 환자식구를 위해서는
힘을 모아(이것이 중요하다)
최선을 다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그를 주님 앞에까지 데려놓는 일을 해야한다.
우리는 미약하지만
주님께서는 기적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 식구들을 주신 이유,
우리 형제들을 함께 살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 가끔은
주님께서
우리 가정과 수도공동체에
이렇게 영육간에 아픈 형제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형제애, 가족애는
주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우리 가족들을 위해, 우리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그런 가족과 형제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음으로 고마움을 표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