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지체 저능아를 가진 자매가 하나 있다.
근데 남편은 그 저능아 아들을 본체만체하며
가정을 돌보지도 않았다.
10여년간 홀로 아들 둘을 키워오면서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겠다며
"보이지 않은 길을 찾아가야 하니
필요할 때마다 힘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간단하게 이렇게 답변하였다.
"눈이 소복이 쌓이면 길이 보이지 않지만
눈이 녹으면 길이 드러나게 됩니다.
인내하십시오."
이스라엘에 왕정이 도입되는 초기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사무엘서의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은
이스라엘 열두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보잘것 없는 가문 출신인 사울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이스라엘의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로서는 상상조차할 수 없는
세리 레위(혹 마태오)를 제자로 선택하신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으시는 하느님의 선택,
즉 누가 생각해도 합당한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데
그 메시지가 있다.
그런데
사울과 레위의 입장에서 오늘 상황을 묵상해 보면
더욱 흥미롭다.
사울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려는 지파들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12지파 중에서 가장 힘없는 벤야민 지파에서
왕이 추대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벤야민 지파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이었다.
비록 출중한 인물과 힘을 갖춘 힘센 용사였지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애당초 길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라진 암나귀들을 찾아 헤매다가
찾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실패 체험이었다.
되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사울의 종이
암나귀들을 찾을 수 있는 노력을 더 해보자고 한다.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성읍에 선견자가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면 암나귀들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한다.
사울은 참으로 종을 잘 둔 셈이다.
그보다도 종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실행에 옮긴 것이
사울이 성공한 이유이다.
대부분 종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말진대,
사울은 "네 말이 옳다! 어서 가자"며
종을 통해 말씀하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하여 하느님의 사람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암나귀도 찾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다.
레위는 어떠한가?
레위는 세리였다.
말하자면 로마인들의 압잡이가 되어
동료 유다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매국노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이 일을 하면서도
늘 죄인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길이 없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처자식을 먹여살릴 방도가 없었다.
자신은 율법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냥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하신다.
가당치도 않는 일이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세리가 길을 찾은 것은
그 말씀에 <예>하며 따랐기 때문이다.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이렇게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때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직접 혹은 그 누구를 통해서든
말씀을 건네실 때, <예>하고 그 길을 쫓아가면 된다.
그 말씀은 길을 열어주신다.
상상치도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 주신다.
기적이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내릴지 모르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가 막막하게 길이 보이지 않았던 때를 한번 돌이켜보면,
그 터널을 어떻게 뚫고 왔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터널을 뚫고 지금 여기 있다.
인내한 결과이다.
그때 분명 하느님께서는 직접 혹은 다른 누구를 통해서
그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내가 정확하게 의식하고 있든 못하든간에
분명 그분이 길을 열어주셨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은가?
그대, 오늘도 길이 보이지 않는가?
그럼 인내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힘써라.
언제 어떻게 말씀하실지 모르기에 깨어 들으려 노력하라.
그럼 소복한 눈이 쌓였을 때는 보이지 않던 길이
햋볕이 나면서 조금씩 녹으면서 그 길이 드러나게 되듯이,
그 길이 보이게 되리라.
그 따사로운 햋볕이 그대에겐 필요하다.
그 빛이 되어 주실 분은 과연 누구신가?
과연 누구를 통해서 빛을 던져 주실 것인가?
근데 남편은 그 저능아 아들을 본체만체하며
가정을 돌보지도 않았다.
10여년간 홀로 아들 둘을 키워오면서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겠다며
"보이지 않은 길을 찾아가야 하니
필요할 때마다 힘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간단하게 이렇게 답변하였다.
"눈이 소복이 쌓이면 길이 보이지 않지만
눈이 녹으면 길이 드러나게 됩니다.
인내하십시오."
이스라엘에 왕정이 도입되는 초기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사무엘서의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은
이스라엘 열두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보잘것 없는 가문 출신인 사울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이스라엘의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로서는 상상조차할 수 없는
세리 레위(혹 마태오)를 제자로 선택하신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으시는 하느님의 선택,
즉 누가 생각해도 합당한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데
그 메시지가 있다.
그런데
사울과 레위의 입장에서 오늘 상황을 묵상해 보면
더욱 흥미롭다.
사울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려는 지파들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12지파 중에서 가장 힘없는 벤야민 지파에서
왕이 추대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벤야민 지파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이었다.
비록 출중한 인물과 힘을 갖춘 힘센 용사였지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애당초 길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라진 암나귀들을 찾아 헤매다가
찾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실패 체험이었다.
되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사울의 종이
암나귀들을 찾을 수 있는 노력을 더 해보자고 한다.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성읍에 선견자가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면 암나귀들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한다.
사울은 참으로 종을 잘 둔 셈이다.
그보다도 종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실행에 옮긴 것이
사울이 성공한 이유이다.
대부분 종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말진대,
사울은 "네 말이 옳다! 어서 가자"며
종을 통해 말씀하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하여 하느님의 사람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암나귀도 찾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다.
레위는 어떠한가?
레위는 세리였다.
말하자면 로마인들의 압잡이가 되어
동료 유다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매국노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이 일을 하면서도
늘 죄인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길이 없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처자식을 먹여살릴 방도가 없었다.
자신은 율법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냥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하신다.
가당치도 않는 일이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세리가 길을 찾은 것은
그 말씀에 <예>하며 따랐기 때문이다.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이렇게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때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직접 혹은 그 누구를 통해서든
말씀을 건네실 때, <예>하고 그 길을 쫓아가면 된다.
그 말씀은 길을 열어주신다.
상상치도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 주신다.
기적이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내릴지 모르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가 막막하게 길이 보이지 않았던 때를 한번 돌이켜보면,
그 터널을 어떻게 뚫고 왔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터널을 뚫고 지금 여기 있다.
인내한 결과이다.
그때 분명 하느님께서는 직접 혹은 다른 누구를 통해서
그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내가 정확하게 의식하고 있든 못하든간에
분명 그분이 길을 열어주셨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은가?
그대, 오늘도 길이 보이지 않는가?
그럼 인내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힘써라.
언제 어떻게 말씀하실지 모르기에 깨어 들으려 노력하라.
그럼 소복한 눈이 쌓였을 때는 보이지 않던 길이
햋볕이 나면서 조금씩 녹으면서 그 길이 드러나게 되듯이,
그 길이 보이게 되리라.
그 따사로운 햋볕이 그대에겐 필요하다.
그 빛이 되어 주실 분은 과연 누구신가?
과연 누구를 통해서 빛을 던져 주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