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죽은 예수님을 부축하는 두 천사들 (1864)
작 가 :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32- 1883]
크 기 : 캠퍼스 유채 :179.5 X 150cm
소재지 : 뉴욕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유복하고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작가는 이런 가문의 부모들이 바라기 마련인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법학 공부에로 유도되었으나,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작가로 변신한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이다.
그의 잠재되어 있던 천재성이 발휘되면서 표출된 과거와 전혀 새로운 작품들은 기성세대의 표현 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과 오해를 받았으나, 항상 새로움을 갈구하던 후학들의 방향 제시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비평과 반대 속에서도 소신 있는 작가답게 초연히 자기 작풍에 몰두함으로서 바람개비처럼 시세에 영합하던 작가들이 얻지 못했던 성공의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작가는 사실주의적인 작풍에서 인상파 작풍으로 변신한 작가였고 그의 작품 소제는 세상적인 것이 대종이었는데, 이 작품을 위시해서 “옷 벗김을 당하신 그리스도” 와 같은 몇 점의 종교적 주제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인상주의 작가답게 성서적인 내용을 교회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서 교회적 표현이 주지 못하던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고, 교회의 가르침에 그리 신선한 감동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역설적으로 복음적 생동감과 감동을 선사할 수 있었다.
성서 어디에도 예수께서 죽으신 후 천사들의 위로를 받았단 내용이 없다. 오히려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켰던 사도 요한과 성모님이, 생전 예수님의 좋은 친구였던 아리 마태아 사람 요셉의 도움으로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에 내린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열심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며 애통하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슬픔과 위로의 관점에서 접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천사들을 등장시키게 되었는데, 이것은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 내용이면서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엄청난 감동을 주었다.
흰 천이 둘러진 평상인 듯 보이는 곳에 주님이 누워 계신다. 가슴과 손바닥과 발엔 십자가의 못 자국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 십자가에서 방금 내려진 모습이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에서 비참한 고통을 겪은 사람답지 않게 젊고 건장한 모습이며 생명감이 넘치고 있다. 많은 기성 화가들은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비참한 죽음을 겪은 인간으로 묘사했으나, 작가는 십자가의 죽음이 앗아 갈 수 없는 생명의 주인으로서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성서 작가들은 언어적 표현의 한계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작가는 십자가의 죽음 안에 들어 있는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을 정확하고 완벽히 표현했다.
오른쪽의 천사가 손가락을 얼굴에 댄 침통한 표정으로 있다. 천사의 검은 빛 날개는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 느끼고 있던 당시 제자들이나 사랑하던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일화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내용을 상기시킨다.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루카 24: 13-17)
이 천사는 오늘도 교회가 여러 시련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실패로 끝난 것과 연관시키면서 신앙 안에서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 연민 속에서 비관적인 삶을 살고 있는 크리스챤들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크리스챤들이 지녀야 할 희망은 부활 신앙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역설적 표현으로 알리고 있다.
앞의 천사가 자기 손을 얼굴에 대고 깊은 근심에 빠져 있는 모습과 달리 이 천사는 오른손으로 주님의 얼굴을 잡고 왼손으로 그분을 몸을 닦으려는 듯 흰 수의를 잡고 있다. 건강하게 보이는 주님의 몸을 싸고 있는 흰 수의는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생명의 상징으로 드러나고 있다.
천사의 얼굴 표정 역시 주님의 얼굴처럼 더 없이 밝은 표정이어서 죽음 앞에 애도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작가의 독창적 역량이 드러나게 된다.
주님의 얼굴은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약간 어두운 색갈인 반면 천사의 얼굴은 밝은 흰색으로 표현함으로서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는” 크리스챤 신앙의 파스카 영성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펼쳐진 천사의 푸른 빛 날개는 밝다는 면에서 뿐만 아니라 한껏 펼쳐지려는 듯 생동감을 내 품고 있다.
이 천사는 여러 어려운 일과 실망스러운 일들이 겹치고 있는 일상의 삶에서 주님 부활의 능력을 믿기에 신앙적 생기 속에 살아가는 크리스챤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작가는 요한복음 20장 5- 12절에 나타나고 있는 내용의 영감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는데, 그중에 작품 내용과 직결되는 것은 다음 구절이다.
"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서서 울고 있었다 .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앉아 있었다 ."
이 부분에서 작가는 인상주의 선구자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기량을 발휘해서 들라 클로와나 고야와 같은 거장들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밝은 색조와 대비되는 어두운 색깔에 악센트를 주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함으로서, 인상주의 선구자로서의 도약을 하게 되었다.
두 덩이의 큰 돌 사이에 뱀이 끼어 있다. 돌은 주님께서 부활하시면서 굴러나 온 돌이고 뱀은 아담 이브를 유혹해서 원죄에 빠트린 악마의 상징이다. 주님을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해방자로 모습으로 부각시켰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죄악감에 시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작가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전통적 신앙이 항상 제시하는 성서로부터 시작하는 연역적인 차원이 아닌 삶의 현실로부터 올라가는 귀납적 차원으로 성서의 내용에 접근하면서 전통적 기법이 줄 수 있는 답답한 정서를 시원히 뚫었다.
작가는 여러 우여곡절로 교회와 원수 관계로 지냈던 프랑스의 명망 있는 작가이며 비평가였던 에밀 죨라(Emile zola: 1840- 1902)로 부터도 “작가 중에 작가”로 칭송 받으면서 교회밖에 살면서도 기성 교회 체제로서는 할 수 없었던 영역의 복음화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