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실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당신이 떠나시기에 제자들은 세상에 남겨질 터인데
어제 당신이 떠나는 대신 성령을 남겨두시겠다고 하신 다음
오늘은 당신의 평화를 남기고 가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당신의 평화는 세상의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하시는데
당신이 계셔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신이 떠나시면서
세상이 주는 평화를 주실 수는 없고, 주시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주는 평화, 또는 세상의 평화란 어떤 것이고,
주님께서는 주시는 평화는 이 세상의 평화와 어떻게 다른 겁니까?
세상이 주는 평화는 우선 별 일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별 일 없는지, 안녕하신지 묻습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괜찮다는 말을 ‘일 없슴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 없는 것, 일 중에서도 특별한 일이 없는 것,
특별한 일 중에서도 좋은 특별한 일은 괜찮지만
안 좋은 특별한 일이 없는 것, 이것이 평안이고, 평화이며
이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불안입니다.
두 번째로 세상이 주는 평화는 갈등이 없는 상태입니다.
한자 平和의 平이 앞서 본 특별한 일이 없는 평화를 얘기한다면
和는 갈등이나 분열이나 다툼이 없는 관계의 평화를 얘기합니다.
세상의 평화란 이런 것이기에 사람들이 제일 바라는,
그러나 가장 낮은 차원의 평화는 안 좋은 일과 관계가 없는 평화이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하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찌 안 좋은 일이 없을 수 있고,
어떻게 모든 관계가 좋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조금 더 성숙하게 평화를 살아내는 사람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평화롭고
안 좋은 관계를 좋게 만들어가는 평화를 추구합니다.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왜 이런 일이 내게?”하고 거부치 않고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왜 이런 사람이 내게”라고 거부치 않으며
그러기 위해서 최선을 기대하지 않고 최악을 각오합니다.
사실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마음이 크게 동요치 않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도 싸우지 않고 잘 지낼 수 있기만 해도
그런 사람 대단하고, 그런 평화 높은 수준의 평화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주시겠다는 평화란 이런 것도 넘어섭니다.
어떤 평화이기에? 성령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봤듯이 주님께서는 떠나시면서 먼저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다음으로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성령의 평화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성령으로 충만한 자의 평화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고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분의 사랑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환난 중에 싹이 트고,
환난 때문에 자라나며,
환난으로 꽃 피우는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돌에 맞아 거의 죽다 살아나는 그 엄청난 환난을 겪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고 말하며
오히려 복음 선포의 열정을 더욱 불태웁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과 다툴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지만
박해를 받는다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좋고 좋은 관계로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의 거짓 평화에 안주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참 평화를 향한 복음화의 여정을 계속해나갑니다.
우리도 세상에 안주케 하는 평화에는 안주하지 말 것입니다.
고통이나 시련이 없이 평탄하게 살다 가고프다는 것이 인간 조건상
너나 할 것 없이 갖는 희망사항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고통 없이 성숙도 없다는 말처럼 고통 없이 평탄하게 사는 사람과
고통을 견디며 산 사람과 똑 같은 질의 성숙이 주어진다고 한다면,
그건 넘 억울하고 불공평하지 않나, 인생길 마저도 낙하산처럼 고통과
시련을 건너뛰기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면 전 그런 하느님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면에서는 참으로 공평하시다는 것이
얼마나 천만다행한 일인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하느님 이신지도 몰라요....
고통 뒤에 성숙이 온다고 일부러 고통을 자처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은
솔직히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고통 없이 편안하다고 고통 속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을 함부로 평가해서도 안 된다는 것일 겁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제 앞에 불어 닥친 고통과 시련이라면 견디어야 한다는.....
내 앞길에 고통 없기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기대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내 앞에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바라는 기도보다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주시라는
기도가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셈법이 나옵니다.
까닭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요한복음 16, 33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고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분의 사랑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환난 중에 싹이 트고,
환난 때문에 자라나며,
환난으로 꽃 피우는 사랑이십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