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오늘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인데 다른 때와 달리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가시면서 너희를 떠나간다고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보내신 분께로 가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가는 방식의 정석을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가족들과 이별할 때
우리도 이렇게 얘기해야 하는 것이지요.
나는 너희를 떠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도 이렇게 이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머니가 우리를 두고 떠나신 것, 버리고 떠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아버지께로 가신 것이라고.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의 딸로 평안하시도록 붙잡지 말고 놓아드려야 한다고.
이것이 초월을 사는 방법입니다.
초월은 떠나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향해 가는 것입니다.
향해 가는 것이 떠나가는 것보다 훨씬 유효한 초월 방법입니다.
우리의 초월은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이것은 오늘 주님 말씀의 두 번째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이것이 너희에게도 유익하다는 말씀이고,
그러니 이것이 더 큰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주 어린 자녀들을 두고 떠나며 엄마가 이렇게 얘기한다면
어린 자녀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슬프기는 하지만 참으로 맞는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더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러니까 내가 가야 보호자가 오신다는 말씀인데
이것을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 대입시키면 어린아이는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엄마가 보호자이고 엄마가 떠나면 아무런 보호자도 없게 되는데
무슨 보호자가 엄마 대신 온다는 말이냐?
계모가 들어온다는 말이냐?
계모가 친모보다 더 나를 보호한다는 말이냐?
어릴 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어릴 때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주님의 이런 말씀은 성숙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두 살 때 돌아가셨지요.
집안의 기둥, 보호자가 없는 것이 어렸을 때는 너무 힘겨운 거였지만
저는 이 때문에 인간적으로도 일찍 성숙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신앙적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일찍 찾고, 만나게 되었지요.
인간의 도움은 없어야 합니다.
인간의 보호는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호자를 우리가 찾고
우리가 찾을 때 참 보호자가 우리에게 옵니다.
그러므로 애석하게도 예수님은 죽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보호자가 우리에게 생깁니다.
"인간의 도움은 없어야 합니다.
인간의 보호는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호자를 우리가 찾고
우리가 찾을 때 참 보호자가 우리에게 옵니다."
하느님만 바라보면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오롯하게 살아가야하는 수도자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 위안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처럼....
나도 내가 기댈 수 있는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마다
아~ 맞어...!라고 하며 인간의 약함을 재확인 하게 되면서도, 이웃을 네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사이에서 냉정과 열정의 시이소를 어떻게 탈 것인가의 긴장이 놓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살면서도 그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그 긴장감......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기에,
"그러므로 애석하게도 예수님은 죽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보호자가 우리에게 생깁니다."라는,
우리를 앞질러 예비하시는 그 사랑에 가슴 뜨거워 짐을 느끼는 이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