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1독서와 2독서는 어떻게 보면 서로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독서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다른 언어들로 이야기 하고 있는 사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은사입니다. 그 은사를 통해서 사도들은 그들이 배워본 적이 없는 언어를 말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 하느님의 능력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은 또한 코린토 공동체 안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코린토 공동체 안에서도 은사와 관련해서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즉 어떤 은사는 대단히 뛰어난 은사, 어떤 은사는 별 볼일 없는 은사.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은사의 중요하고 덜 중요함을 구분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서 중요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대우해 주었으며, 반면, 덜 중요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덜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즉 은사를 통해서 사람의 중요함과 덜 중요함이 구분되었고, 그렇게 사람들을 갈라놓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모습은 자주 볼 수 있는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과정 속에서 능력의 경중을 통해서 사람을 구분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일치를 강조하는 과정 속에서 다양성을 무시하고 획일화 되어가는 것도 좋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고, 일치 속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다양성은 너와 나를 구분하기 위한 다양성이 아니라, 하느님을 전하기 위한 다양성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더 널리 퍼지기 위한 다양성입니다. 코린토서에 나타나는 일치는, 같은 하느님, 같은 주님, 같은 성령에게서 은사가 나오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즉,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은사를 받았고, 그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전한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일치를 이루어야 하지만, 그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다양성을 지녀야 하고, 지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다양성과 일치는 우리가 하느님을 전할 때, 전혀 모순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의 말씀을 하시면서, 이어서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즉 하느님을 전하는 것과 서로 용서하는 것이 연결됨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상대방에게 내 허물, 내 약점을 드러내고, 용서를 청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 용서해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줄 수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다름 때문에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때로는 화가 나지만, 용서와 화해 안에서 우리는 상대방에게 우리의 마음을 좀 더 열 수 있고, 획일주의가 아닌 진정한 일치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