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제 야고보와 요한에게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신 주님께서는
오늘 바르티매에게도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시는 얘기를 연이어 배치한 것인데
여기에 뭔가 이유나 의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제자들과 바르티매오의 비교, 대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임에도
세상에서 권력자가 되기를 주님께 바랐고 청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제자들이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당신이 애써 가르치신 것이 허탕이 된 것 때문에
아주 허탈해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 비해 바르티매오는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청했지요.
그런데 영적인 눈이 뜨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제자들과 도진개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바르티매오의 바람과 청원이 조금 더 순수하다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르티매오의 청을 받아들여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바람과 주님의 바람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바람은 무엇이고 주님의 바람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당신께 무엇을 바라기를 주님은 우리에게 바라실까요?
제 생각에 주님의 바람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인데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서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청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며
하느님의 뜻이 이 땅과 내 가정과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청하라 하십니다.
지금 저는 선교 문제로 중국을 돌고 있고 여러분의 조언을 듣고 있는데
제가 만난 분 중의 한분이 제게 이런 조언이랄까 충고를 해주셨습니다.
수도회가 꼭 모든 것을 직접 다 해야 한다고 생각지 말고
수도회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 선교를 한다면 지역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지역교회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데
수도회가 원하는 것, 예를 들면 성소자를 얻는 것만 바라고
그래서 그런 쪽에만 관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선교 이기주의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선교에도 이기주의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며
하느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라 나의 확장이지요.
내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청할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내가 이루려고 해야 함을,
아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이루는 것까지는 못할 지라도
하고자 하는 마음만은 우리가 가져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