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칼레의 시민들 (1884–ca. 1889)
작 가 : 아우구스틴 로댕 (François-Auguste-René Rodin, 1840 – 1917)
크 기 : 청동 (209.6 × 238.8 × 190.5 cm)
소재지 : 프랑스 파리 로댕 미술관
혼란스런 현실의 해결에 책임 맡을 최고 지도자를 뽑기 위해 정부 당국이 추천한 인사를 보면서 참으로 황당한 정서를 느끼게 된다. 그전에도 정부가 추천한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추한 과거 행적이 드러나면서 낙마를 반복한 처지에서 새로 추천한 사람은 과거 올라왔던 모든 후보자들의 적폐를 모운 것 같은 경력의 소유자라 생각 있는 사람들을 참담하게 만들고 있다.
누구의 말대로 이제 우리는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시대가 아니라 세상이 부패한 종교를 걱정해야 할 시대를 살고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든다.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을 피하는 것을 노련한 처신으로 여기는 지도자들, 부끄러움을 모르는 지도자들, 후안무치[厚顔無恥]가 오히려 성공을 겨냥하는 사람들이 올라야 할 사다리처럼 여겨지는 우리네 현실에서 이 작품은 오늘 우리 사회 지도층에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과제를 알려주고 있다.
민주 사회에서 지도자라는 사람은 세습 인사가 아니라, 그 국민에 의해 뽑히는 것이고 보면 그 지도자의 모습은 국민의 수준이라 생각하면 우리 국민 모두가 부끄러움이 뭔지를 알아야겠고 이 작품은 오늘 우리 국민들에게 꼭 필요한 교훈을 주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었던 영토에 대한 욕심과 왕위 계승권에 대한 갈등으로 시작되어 100년 내내 지속되지는 않고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나, 수세대에 걸친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들의 전쟁 시기에 있었던 감동적인 사건을 작품화 한 것이다.
이 전쟁은 1337년에 시작되어 1453년에 끝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프랑스에 있던 잉글랜드의 봉토를 놓고 일어났던 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12세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프랑스의 북부 자치 도시였던 칼레 시민들은 일 년 가까이 영국 군대를 대항하여 싸우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백기를 들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진작 항복하지 않고 오래 반항함으로서 영국을 신경 쓰이게 만든 보복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한다.
일단 항복을 했으니, 칼레 시민들은 살려 두겠으나, 칼레 시민들 중 지도급 인사 6명을 뽑아 이들이 교수형에 사용될 밧줄을 목에 메고 영국군 진영에 와서 도시 열쇠를 왕에게 건넌 후 교수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청천벽력과 같은 제안 앞에 이 도시의 지도자들은 발뺌을 하지 않고 자원해서 이 십자가를 지기로 했다.항복 조건을 들은 칼레 시민 중에서 가장 부유하기로 소문 난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ustache de Saint-Pierre) 가 일어나 말했다.
“ 여러분, 이 비극적인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처지에 이렇게 많은 시민이 굶어죽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먼저 이 목숨을 바쳐 영국 왕에게 용서와 자비를 구하겠습니다. 기꺼이 맨발에 맨머리로 목에 밧줄을 두르고 나가 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
그가 지원하자 역시 부유한 인사였던 쟝 데르(Jean d'Aire)가 자원했다. 이들의 너무도 숭고한 결정에 감동한 사촌과 다른 상인 부자가 자원하면서 이 도시의 귀족들로서 모두 일곱 명이 죽음을 자원했다.
영국 왕이 요청하는 것은 6명이었으니 제비를 뽑아 결정하자는 견해도 있었으나, 그날 제일 늦게 오는 사람을 빼자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약속장소인 장터에 6명이 다 모였는데,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자원했던 피에르가 나타나지 않자, 의아해서 그 집에 가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영웅적인 결단을 한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낙오시키지 않고 명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사려 깊은 배려였다. 이 죽음을 확인한 칼레 시민들은 고매한 인품을 지닌 그를 생각하며 처참하고 슬픈 가운에서도 칼레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으로 자신들을 추스르게 되었다.
이때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왕비는 임신 중이었는데, 죽음을 자원한 이들의 결단에 대한 감동과 함께 이런 의인의 죽음은 태어날 자기 아들에게 해가 될 것이란 두려움에 왕에게 간청해서 이들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6명의 칼레 시민들이 보인 이 고귀한 태도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고귀한 신분에 있는 지도층일수록 자기 처신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이것이 본인에게도 명예가 된다는 생각으로 정착되면서 후안무치의 태도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던 본인에게 대단한 불명예라는 것을 안겨 주면서 그리스도교 바탕에 시작된 유럽 사회에서는 이것이 면면히 이어졌다는 것이 자랑이기도 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의 뜻은 닭의 벼슬이라는 뜻에서 연유했는데, 이것은 로마 시대부터 고귀한 사람들의 불문율이었다.
로마 제국 시절 귀족들은 단순히 신분이 노예와 다르다는데 고귀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원한 칼레의 부유층처럼 사회 정화와 공익의 창출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것은 죽음을 내놓아야 하는 것처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나 이 가치에 대해 대단한 매력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 사건은 어떤 유혹과 시련 속에서도 고귀함을 살고픈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이어오다, 이 사건이 있은 지 500여년이 지난 후 칼레 시장의 발의로 이것을 조형화시킬 결정을 하고 여러 작가들을 물색하다 미켈란젤로 이후 조각가로서 가장 천재성을 인정받던 작가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이 작품을 제작하기로 결정한 작가는 자신의 구상을 드러내자, 많은 사람들이 난색을 표하게 되었다. 작품을 주문한 사람들은 이들의 미덕을 영웅시하여 승리자의 모습으로 부각되기를 바랐는데, 작가는 전혀 반대되는 관점에서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
작가는 이들의 고귀한 인품에 대한 영웅적 찬사를 표현하기보다 많은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기를 결정한 이들의 고뇌와 잠시나마 이들이 받아야 하는 세상 시선으로부터 실패하고 어리석은 인간으로 대접받는 모멸감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성서의 다음 말씀 표현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제작했다.
“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지혜 3:4)
이들의 결단은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는” 파스카의 신비를 증거 하는 것으로 여겨 작가는 이들의 인간적 고뇌와 고통을 표현했다.
또한 그들의 결정의 목표는 귀족 신분으로서 자기 몸을 바쳐 중생들의 어려움을 덜어준다는 공통적인 것이었나, 이런 결단을 하는 각자의 사정은 너무도 다른 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정신적인 일체성 외에 어떤 집단적인 동질성도 배격하는 묘사를 했다.
그들은 서로 간에 다른 방향을 두고 서 있으며 어떤 사람과도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다. 이 고귀한 결단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며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성에서 이루어진 결단임을 전하고 있다.
로댕은 이런 고귀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각 인물상에 각각 다른 자세를 취하게 하여 심리적으로 각 인물들을 일체화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6인의 군상(群像)은 전체적인 통일 가운데 정(靜)과 동(動)의 요소가 교묘하게 교차되어 각 개인의 표현이 평등하게 중요시되고 있다.
보통 이런 조형물들은 높은 대위에 올려 사람들이 우러러 보게 만드는 게 상례였으나 작가의 견해는 달랐다.
이 역사적 사건은 우러러 보며 공경해야 할 것이 아니라 본받아야 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관람객과 같은 수준의 평면에서 처리했고 작품들의 크기 역시 보통 사람들과 비슷하게 함으로서 친근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신앙적 가치가 현실 삶에서 행동으로 표현될 때 그 가치가 감동을 줄 수 있다.
이 작품을 바라보노라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성서의 다름 구절에 심취한 사람들이 창출한 가치로 여겨진다.
“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어느 민족이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존해야 할 장점과 고쳐야 할 단점이 있는데, 우리 민족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파렴치한 태도를 예사로 하는 것, 특히 사회 지도를 맡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이것이 결여 되어있기에 오늘의 사회적 혼란과 어려움이 생기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크리스챤들이 보여야 할 덕목은 바로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것을 증거 하는 것이라 믿는다.
크리스챤은 어떤 사회적 신분과 상관없이, 빛과 소금을 살아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에 익힌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성서의 다음 구절은 바로 우리가 무심히 여기지 쉬운 이 의미성을 깨우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 (1베드 2:9)
이 작품은 작가의 작품이 진열된 박물관 외에 영국, 미국, 일본 등 여러 곳에 복사본으로 전시되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작품들을 전시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나라 상류사회에 속하는 지도자들이 이 작품을 보고 자기가 고쳐야할 면을 바라볼 수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