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재의 수요일에 읽는 복음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리고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이 복음을 읽는 이유는
사순시기란 회개의 사순시기이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 세 가지가 회개의 표시이자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을 봐도 그리고 우리 이웃을 봐도 회개한 사람은 너나할 것 없이
회개하기 전에는 하지 않던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하기 시작합니다.
회개하기 전에는 자선이란 아예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자기 욕심 채우기에도 급급하고 심지어 남을 등쳐먹기도 하는 사람이
자선이라는 것은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지요.
혹 자선을 한다면 그것은 진정 어려운 이웃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님께서 비판하시듯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자선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욕심으로 향하던 사람이 회개를 하고 나면
이제 비로소 이웃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웃을 향해 돌아섭니다.
회개하기 이전의 사람은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식은커녕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만족이지요.
욕망과 그 욕망을 채우는 쾌락 없이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 경우도 혹 단식을 한다면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단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던 사람이 회개를 하고 나면 쾌락에로 향하던 욕망이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이웃사랑에의 열망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보이기 위한 단식이 이제는 갈망과 열망의 단식이 되고,
자기를 희생하여 사랑을 불태우는 단식이 됩니다.
그러나 회개했다는 표시는 무엇보다도 기도입니다.
그저 돈 버는 것과 먹고 즐기는 것에 모든 시간을 쓰던 사람이,
기도가 너무 싫고, 그래서 기도와는 담을 쌓고 살던 사람이
이제 기도가 너무 맛있고 그래서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냅니다.
결코 의무기도가 아니라 주님과 밀어를 나누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회개를 요약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단식과 자선과 기도에서 모두 나타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입니다.
그러니까 회개 이전의 사람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에 신경 쓰는 사람입니다.
술독에 빠져 사는 것도 회개 이전의 상태이고,
음란한 생각만 하는 것도 회개 이전의 상태이며,
사기공갈을 치는 것은 더더욱 회개의 이전의 상태이고,
다른 사람에게 무신경하고 안하무인적인 것도 회개 이전의 상태이지만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도 회개 이전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은 당연히
사람들 앞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무신론자가 하느님 앞에 있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있지 않는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런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실천적 무신론자, 예, 이렇게 불려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만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 앞에 있는 사람!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크게 세 부류의 사람이 있는 거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 있지도 않고 사람 앞에도 있지 않는 고립의 사람.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오직 사람 앞에 있는 무신론적인 사람.
하느님 앞에 같이 있고 하느님 안에서 너와 나를 보는 믿음의 사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것을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