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료 : 목판 그리스도,
크 기 : 18 x 34.5cm
소재지 : 이집트 시나이 산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
하느님을 뜻을 따르기로 약속한 크리스천들은 허약한 심성을 지녔기에 죄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하는 아픔의 역사를 만들었으나, 하느님을 외골수로 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흔적들은 오늘도 많은 순례자들을 부르면서 숭엄함 감동을 느끼게 만들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집트 시내 산에 있는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이다.
250년경 로마 데치우스 황제(249-251)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지방에서 피신해온 이집트의 크리스천들은, 로마 군인들의 눈을 피해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이곳을 모세가 하느님의 소명을 들었던 떨기나무 사건(탈출3,4)을 연관시키면서 수도 공동체를 만들었다. 현재 남아 있는 수도원은 548-56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것이다.
이 수도원의 주보 성녀이신 성녀 카타리나는 우리나라에선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 교회에선 대단한 공경을 받고 있는 성녀이시다.
전설에 의하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상류 가정 출신으로 뛰어난 미모와 학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세례를 받은 후 온전히 신앙에 몰두하면서 결혼을 거부하다가 순교했는데, 천사가 성녀의 유해를 시내 산으로 옮겨와서 수도원에 모심으로서 이 수도원은 무슬림 교도들의 틈바구니에서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천년 이상을 버틴 장한 크리스천 영성의 성지로 존경받게 되었다.
이 수도원에는 귀한 성서 사본을 위시해서 많은 보물급 수준의 성화들이 보관되어 있다.
사막의 건조한 기후가 이콘의 부패를 막을 수 있었기에 천년 이상을 견딘 많은 보물이 있으며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의 하나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는 구구 각색이었다. 마르코 복음은 바로 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마르8,27-30)
천지의 창조주 그리스도 (Christ Pantocrator)라는 이 이콘은 동방교회에서 대단한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서 많은 성당의 제단 부분 중앙에나, 아니면 성당의 중앙 부분에 이 성화를 모시고 있다.
초세기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이 받아들이기 가장 쉬운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의 사회적 배경에서 익숙한 힘 있는 모습의 예수였다.
당시 사회적 정서에 익숙했던 희랍의 제우스 신처럼 막강한 파워를 지닌 존재에다, 로마 황제와 같은 권력을 지닌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그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영향 아래 초세기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이 믿는 하느님을 그 당시 다른 이교인들이 믿고 있던 신들과는 전혀 다른 힘있는 존재로서의 부각시키게 되었다.
또 박해 속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던 당시에 십자가에 달린 허약한 모습의 예수 보다는 힘 있는 존재로서의 예수가 더 의지가 되었던 인간적 차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이처럼 그 시대 문화적인 배경에서 수용되었기에 이 작품은 현대적인 시각에서는 좀 어색하지만 당시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스승 예수에 대한 좋은 모습이었다.
그리스도의 얼굴 표정은 막강한 권력자의 인상과는 거리가 먼 온화하면서도 약간 우수에 찬 모습이다. 이렇게 우수에 찬 모습임에도 근엄함이 함께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뒷면은 성덕의 상징인 후광에 쌓여 있으나 십자가의 흔적은 없다. 후기에 제작된 아이콘에선 후광 부분에 십자가를 그리고 있으나 이 작품에서는 없는데, 이것은 당시인들의 신앙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당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죽으신 분으로 믿기에는 자기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신흥 종교로서 폭발적인 인기로 부상되기 위해선 자기들의 문화 정황에 어울리게 힘 있는 존재로 부상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현대에 와서 너무 일반적인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사도 바오로가 그토록 강조하신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마음에 각인되는 데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1,22-25)
주님께서는 왼손에 성서를 들고 계신다. 성서가 전능하신 하느님의 말씀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값진 보석이 박힌 장엄한 인상을 주는 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의 표지에는 값지게 조각된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성경에 십자가를 새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나 너무도 위엄 있는 예수님의 모습에는 어울리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당시 사람들에겐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공경의 표현이 이런 고귀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표현됨으로서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착한 목자”로서의 인자하고 자상한 모습의 예수를 부각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나, 인간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서는 적절한 표현이다.
주님의 오른 손은 인간을 축복하시는 자세를 보이고 계신다. 동방의 모든 이콘에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상징적인 표현인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삼위일체를 손의 자세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인간들을 축복하시는 모습으로 너무도 위대한 하느님의 모습과 함께 너무도 자상한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을 표현하고 있다.
막강한 힘에 눌려 절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너무도 자비로우시시에 절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그런 하느님의 모습이시다. 막강한 힘과 함께 부드럽고 자상한 사람의 모습을 지니신 하느님의 모습이시다.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모습 보다는 힘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당시의 신앙을 너무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이 들고 계신 복음서에 새겨진 십자가나 근엄한 가운데 어울리지 않는 우수를 띈 주님 얼굴에서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음으로 까지 인간에 대한 큰 사랑을 표현하셨던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진면모를 드러내기도 한다.
예수님의 얼굴에 드리는 우울한 모습은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성을 지니면서도 인간에의 사랑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표현하시는 인간 예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전능전지하신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과 우리와 꼭 같은 허약한 육신을 지닌 인간 예수님의 모습을 너무도 잘 조화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현존하는 이콘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