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모님 품에 잠든 아기 예수 (1610)
작가 :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Orazio Gentileschi 1563- 1639)
크기 : 켐퍼스 유채 : 99.8 X 85.3cm
소재지 : 미국 보스턴 하버드 대학 박물관
16세기 이태리를 대표 작가로 인정받던 그는 당시 유럽 사회를 석권하던 카라바조 화풍을 전수하여 화려하면서도 서정적인 기법을 과감히 표현함으로서 당시 교회의 정서에 일조를 하던 작가였다.
당시 교회는 엄청난 시련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교회의 부패에 반기를 들고 시작된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은 독일 이북을 전부 개신교에 빼앗길 만큼 큰 손실과 충격이었으며,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가톨릭교회는 반종교 개혁(Counter - Reformation)을 시작했다.
이것은 외적으로는 개신교의 세력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게 저지하면서, 내적으로는 개신교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교황청의 사치와 함께 교회의 부패를 해결하기 위한 자정(自淨)을 시도했다.
또한 복음적 가난을 보일 수 있는 검박한 교회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런 시도는 종교개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는데 대단한 성과를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개신교를 대항해서 새로운 외적인 시도를 한 것 중 특별한 것이 바로 예술적 표현을 통해 실추된 교회의 권위와 의기소침해진 선량한 신자들에게 신앙적 용기를 불어 넣는 것이었다.
당시 개신교는 교회의 사치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성미술에 대한 모든 것을 우상숭배라는 황당한 표현으로 매도하는 편협한 정서에서 그들이 외치는 복음적인 신앙이라는 것이 너무도 삭막하고 살벌한 것이었다.
“오직 성서만으로”라는 문화적인 바탕을 무시한 당시 개신교의 태도는 교회가 세파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의 장소가 되기보다 전통과 이단을 심판하는 살벌한 법정의 인상을 주고 있었다.
사실 가톨릭교회가 종교재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창시자인 칼빈과 츠빙글리 역시 그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가차 없는 형벌을 가한 역사가 있다.
이런 현실에서 카라바조를 위시해서 가톨릭 작가들은 개신교의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교회를 웅장하고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서 천상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다.
하느님을 아름다움의 원천으로 볼 안목이 없었던 개신교가 개혁을 강조하면서 더 척박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사이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은 아름다움의 원천임을 알고 있었기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표현으로 신앙의 새로운 면모를 표현함으로서 부패한 집단의 이미지로 실추되었던 교회를 새로운 매력의 장소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작가는 화려하고 우아한 표현의 기법으로 당시 유럽 여러 나라로부터 작품 주문을 받아 프랑스와 영국에 까지 작품을 남길 만큼 역량 있는 작가였다.
어두운 바탕을 배경으로 아기 예수님을 무릎에 뉘인 성모님이 앉아 계시는데,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은 무대 위의 배우의 모습으로 등장해 있다.
배경의 어둠과 등장인물의 밝고 화사한 대조적인 표현은 바로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던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고 불리는 카라바조 기법이다.
이런 극단적 대비의 방법을 통해 작가는 무릎위의 아기 예수님이 장차 걸으셔야 할 수난의 길을 암시적으로 표현했다. 작가는 당시에 유행하던 여러 상징들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서 관람자들에게 은유적인 방법으로 진리에 대한 감동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성모님의 무릎위에 누워 고이 잠든 아기 예수님의 오른 손엔 사과가 쥐어져 있는데 이것은 창세기에 원조들이 하느님을 거역함으로서 낙원에서 추방된 실낙원의 원인 제공을 상징하고 있으며 아기 예수님은 장차 구세주로서 인류를 구원하실 분이심을 상징하고 있다.
즉 성모님의 무릎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은 실낙원의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복락원으로 인도하실 분이심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검은 빛 배경에서 너무도 밝고 화사하게 표현함으로서 관객들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윤리적 차원의 경직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너무도 큰 기쁨의 사건임을 드러내고 있다.
무릎에 누워 잠드신 아기 예수임을 바라보는 성모님을 둘러 싼 어두운 배경에서 당신 아들 예수의 수난을 슬퍼하시는 성모님의 어머니다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 성모님과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머니나 예수의 어머니라는 것과 전혀 거리가 먼 아름답고 화사한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명인 인간 구원이라는 중요한 면모를 제시하고 있다.
성화에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후광과 같은 종교적 상징이 전혀 배제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성을 통해 신앙의 초월적인 내용을 너무도 부담 없이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을 누이기 위해 사용한 흰색의 천은 십자가의 죽음 후에 예수님의 시신을 감쌋던 면포를 상징하면서 너무도 인간적인 모자의 모습을 통해서도 인간 구원의 협조자로 등장하신 성모님의 존재성을 표현하고 있다.
당시 개신교도들은 성모 공경을 비성서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 큰 공격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던 터에, 작가는 성서 이전 인간적 바탕으로부터 성모공경의 신앙적 차원을 제시하여 사람들을 설득시키고자 했다.
주무시는 아기 예수님을 무릎에 안고 계신 성모님은 성체 성사를 통해 예수님을 세상에 모셔오는 제단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당시 개신교들은 가톨릭교회의 핵심교리인 성체 성사를 맹렬히 반대하던 때였는데, 작가는 이 부분에서 성체성사를 옹호하면서, 성모님의 역할이야말로 성찬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재현하는 제단임을 드러내고 있다.
개신교도들의 유일한 주장은 자기들만이 가장 성서적인 바탕을 지닌 종교이며 가톨릭은 많은 이질적인 것이 혼합되어 타락한 종교로 치부하면서 갖은 악선전에 열을 올리던 처지에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성체성사야 말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재현하는 것임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자기의 아들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서 성체성사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역할은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제단과 같음을 감동적인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모님은 자기 머리를 덮은 베일의 끝자락으로 아기 예수님의 머리를 덮고 계시는데, 이것 역시 감동적인 상징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아들 예수님을 제단에서 거행되는 성찬례에서 변화되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성모님의 베일은 성체에 대한 최고의 경배 예식인 성체강복 전례에서 신자들을 강복할 때 성체를 모셔오는 수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개신교가 가톨릭 공경의 주 무기로 사용하던 성체성사와 성모공경을 너무도 감동적인 인간적 차원에서 끌어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공감을 얻게 만들었다.
이런 면에서 이 아름다운 작품은 당시 교회에 필요한 가톨릭 신앙의 정통성을 설득력있게 제시한 한편의 호교서로 볼 수 있다.
작가는 파죽지세로 성장하면서 가톨릭교회를 비난하고 압박하는 개신교의 세력을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으로 반박함으로서 가톨릭 신앙의 건전한 정통성을 확인시킨 신앙의 옹호자가 되었다.
가톨릭교회가 자기 부패라는 업보에 허덕이고 당황하는 순간에 교회를 사랑하고 지키고자 하는 예술가들은 천상의 영광과 성서적 내용을 많은 상징들을 도입해서 웅장하게 표현함으로서 상처를 내딛고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