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이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오늘 복음은 짧지만 어떤 대조를 보여줍니다.
죽이는 자와 살리는 자의 대조이고,
예수를 죽이려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대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백성의 지도자들은 죽이려고 들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살리실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도자들은 권력,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힘이 없는 사람은 죽이고 싶어도 죽이지 못하는데
힘을 가지고 있기에 남을 죽인다는 그런 뜻도 있지만
지도자들이 권력자일 경우에는 권력을 위협하는 사람을 죽인다는 뜻입니다.
지도자들 가운데는 두 가지 형태의 지도자가 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데 힘을 쓰는 참된 지도자와
앞에서 얘기한 그 권력자인 지도자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힘을 남을 위하고 봉사하는데 쓰지만
권력자인 지도자는 힘을 자기를 위해 쓰고,
그래서 자기가 권력을 쥐는데 도움이 되면 살리지만
권력을 위협할 경우 가차 없이 죽여 버립니다.
작금의 정치 안에서 우리가 생생히 보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권력을 쥐는데 도움을 줬던 어제의 동지를
배신자 운운하며 가혹하게 쳐내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것이 권력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권력과 거리가 먼 사람도 남을 찍어버리고 쳐버리고 싶어 합니다.
권력자와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일 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찍어버리고 쳐버리고 싶어 하지요.
차이가 있다면 권력자는 그럴 힘이 있고
보통 사람은 그럴 힘이 없다는 것뿐이죠.
자기중심적일 때 우리는 남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데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런 존재에게 향하는
어떤 파괴적인 에너지, 힘이 바로 미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남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까?
내가 뭐간데 남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누가 내게 자기 마음에 들기를 바란다면,
바라는 정도가 아니라 요구를 한다면,
그리고 요구하는데도 요구대로 되지 않자 미워한다면
물리적인 폭력은 아니더라도 이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미움은 무관심과 달리 관계 에너지이기는 한데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관계 에너지입니다.
이에 비해 사랑은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관계 에너지입니다.
주님은 부러진 갈대라고 하여 꺾거나 잘라 버리지 않으시고,
심지가 깜빡 거린다 하여 아예 꺼버리지 않으십니다.
부러진 갈대를 세우시고 깜빡 거리는 심지를 다시 살리시는,
아니 살리시려고 갖은 애를 쓰시는 주님이 눈에 그려집니다.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화덕에 불을 붙이려고 하는데 자꾸 꺼지니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 올리고 머리는 숙인 채
입으로 바람을 일으켜 꺼져가는 불을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꺼져가는 저를 살리고, 우리 공동체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성령의 바람, 사랑의 바람을 저와 우리 안에 불어넣으시려
갖은 애를 쓰시고 제게 몰입하시는 주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주님! 이렇게 제게 몰입해주시니.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 올리고 머리는 숙인 채
입으로 바람을 일으켜 꺼져가는 불을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 말입니다.//
신부님.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 꺼져가는 불을 살려야 할 때 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7. 19. 새볔에서야 가입, 17일 직접 들은 강론 다시 읽으며 새로움에 이어
18일 강론을 접하며 계속 걸으실 신부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평화와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