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의 복음은 단연 관상이 그 주제입니다.
<보다>는 동사가 일곱 번이나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르톨로메오, 곧 오늘 복음의 나타나엘이 부르심을 받는 얘기는
필립보가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에 나자렛 출신인 예수님께 뭐 볼 게 있겠냐고 나타나엘이 시큰둥하자
직접 보면 달라질 거라는 뜻으로 “와서 보시오.” 하고 필립보는 초대합니다.
와서 보라는 이 말은 먼저 주님께서 첫 제자들을 초대할 때 하신 말씀인데
이제 이 초대는 제자들에 의해 다른 제자들에게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볼 것이 있는 것은 내가 초대하지 않아도
보고 간 다른 사람이 대신 초대를 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잘 만들면 광고를 많이 하지 않아도
그것을 본 사람들의 입소문이 광고를 대신하는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와서 뭘 보고 갔기에 다른 사람을 또 데리고 올까요?
아니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무엇으로 제자들을 사로잡았을까요?
그것은 오늘 나타나엘이 감동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타나엘이 주님을 뵙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보고 계셨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보기 훨씬 전부터 우리를 보고 계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시편 139편의 말씀처럼 안다는 뜻이며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지요.
시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하느님, 저를 살펴보시어 제 마음을 알아주소서.
저를 꿰뚫어 보시어 제 생각을 알아주소서.
제게 고통의 길이 있는지 보시어 저를 영원의 길로 이끄소서.”
우리 인간이 보는 방식은 많은 경우
지나쳐 보거나 흘낏 보거나 얼핏 보는 것처럼 소홀히 보기가 일수이고
소홀히 보지 않는 경우에는 째려보고, 노려보고, 달리 보는 것과 같이
나쁜 의도에 의해 잘못 보기가 일수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보시고,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똑바로 아십니다.
나타나엘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실뿐 아니라
거짓 없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도 아십니다.
어쩌면 12 사도들 중에서 제일 반듯한 사람을 뽑으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으로 보시고, 정확히 알고 계시는 분을
이제 나타나엘이 마주 보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외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의 눈을 가진 나타나엘에게 주님께서는
더 대단한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면밀히 뜯어보면
주님께서는 너에게 말한다고 하시면서 너희는 보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나타나엘뿐 아니라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주님을 마주 보고,
믿음의 눈으로 보면 주님에 의해 열린 하늘을 보게 될 거라는 뜻이지요.
이 세상에서 열린 하늘을 본 사도가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톨로메오이고,
이 축일에 우리도 바로톨로메오처럼 하늘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봅니다.
항시 이 말씀을 기억하면 바르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