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주님께서 요 말씀까지만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 요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의 분위기는 아주 우호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 말씀을 하시기 전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그리고 루카복음은 마르코나 마태오 복음과는 달리
요 말씀을 듣고 난 뒤 고향사람들의 사람들 반응도 좋게 묘사합니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기에 딱 여기까지만 말씀하셨다면 모든 것이 너무 좋았을 것이고,
적어도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들먹이고,
예수님도 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맞받아치시며,
이 말에 그치지 않고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하느님은 고향보다도 이방인들에게 예언자를 파견하셨다고 하십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안 좋게 얘기하는 고향 사람들의 말에
기분이 상해서 안 좋게 맞받아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은 우발적인 되받아치기, 그런 거였던 걸까요?
물론 고향사람들이 잘 받아들였으면 이런 말씀을 안 하셨겠지만
그렇다고 주님께서 고향사람들의 반응에 기분이 나빠
감정적으로 되받아치신 것은 아니지요.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면 그러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제 생각에 이 또한 가르침이고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당신을 이해하려들지 말라는 것과
하느님의 역사는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마태오복음을 듣고 오늘부터 루카복음을 우리는 읽는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당신이 누구이고
장차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이사야서를 빌어 말씀하시는 장면이지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어주신 분이시고,
하느님의 성령께서 당신 위에 내려온 분이시며,
하느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분이심을 얘기하시는데
고향사람들은 하느님과의 관계성은 부정하고
그저 인간적인 관계성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고향사람들도 그렇고 우리도 종종
<신적인 근원성>을 모르거나 망각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모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우리의 근원은 하느님에게 있는 것인데
우리의 신앙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언자가 고향에서는 존경받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사명을 주어 보내신 존재인데
어릴 적부터 예언자를 봐온 고향사람들은
예언자의 <신적 근원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적인 근원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생각과 다르게 역사하심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자기들의 하느님은 자기에만 비를 내려주시고
다른 사람들, 이방인들에게는 비를 내려주시지 않는 분,
아니 내려주시면 안 되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고향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신 것인데
고향사람들은 역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것이 그들의 그릇이었고 한계였던 것입니다.
나도 <신적인 근원성>을 모르는 존재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을 문득 영혼없는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말이란 영혼의 울림이라는데 영혼없는 말을 하는 것은
진정한 인간, 하느님의 모상성을 저버리는 행위일 수 있겠다는.....
주님의 고향사람들을 통해 또 한 수 배울 수 있어서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