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을 하자고 제안을 하셨는데, 제안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 가회동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이후, 저희 관구 홈페이지에 “가회동 성당”, “요한”, “신자”, “큰별” 등의 이름으로 올려진 글들을 보면서, 분노와 항의의 글이지만, 같은 교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올리신 글이라 여기고 부족하나마 답변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일차적으로 5월 31일 “가회동 성당”이름으로 올려진 글을 보고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분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요한 형제님께서 토론을 제안하셨기에 토론에 앞서 요한 형제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1) 토론은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가운데 상호간에 비방하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논의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법적으로 규정된 토론 규범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상식선에서 지켜야 할 예의나 법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의견과 다르다 할지라도 논리와 타당성이 있으면 상대방을 인정해 주기도 해야 하구요. 여기에 우리가 하는 토론은 본질적으로 성서에 바탕을 둔 복음적 토론입니다. 그러나 5월 31일자 이후에 올려진 글들과 덧글을 보면, 서로를 존중하고 평등한 입장에서 하는 신사적인 토론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토론에 앞서 먼저 요한 형제님께 요한 형제님과 관련된 글들 가운데, 지나친 표현에 대해 우선 정중하게 사과부터 하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2) 요한 형제님께서 올리신 글 가운데 “사목 헌장 구석에 있는 쓰레기 들고 와서 반박하시겠지요”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교회법 749조에 의하면, 보편(세계)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이 보편 교회를 위하여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확정적으로 고수해야 할 교리를 선언하며 교도권을 행사할 때, 주교단은 교도권의 무류성을 지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이러한 무류권을 지닌 세계 공의회 문헌입니다. 더욱이 사목헌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가장 중요한 4개의 헌장 중 하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의회 문헌은 교회법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목 헌장을 포함하여 4 개의 헌장 안에는 어디에도 “쓰레기” 같은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무류적 권위를 지니는 사목 헌장에 대해 “구석에 있는 쓰레기 들고 와서 반박”한다며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학적 토론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의회 문헌마저 공감하기 어렵다 해서 쓰레기라 여기신다면, 저의 이야기는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요한 형제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쓰레기 취급 당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 아닙니까?
또 “칼 라너가 예수요?”라고 질문을 하셨는데, 제가 올린 글 어디에 칼 라너가 예수로 언급되었습니까? 저는 간접적으로라도 그런 의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칼 라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전문위원으로 참석했고, 공의회 문헌 작성에 참여한 신학자입니다. 오늘날 칼 라너가 갖고 있는 신학적 권위는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가 갖는 권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교황님은 물론이고 많은 주교 추기경들도 라너의 신학 이론은 존중을 합니다. 발타살 같이 라너의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학자들조차 라너 신학의 위대성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이런 큰 신학자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학적 토론을 전개할 수 있습니까?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신앙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성서, 공의회 문헌, 교회법전뿐만 아니라, 이러한 근거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있도록 이끌어주는 중요한 신학자들 이론도 열려진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신앙의 커밍아웃을 요구하셨는데, 저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고, 커밍 아웃할 것도 없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요한 형제님께 요한 형제님께서 누구신지 먼저 신분을 확실히 밝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4) 저도, 요한 형제님도, 불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존중하는 마음과 열려진 마음으로 토론을 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교회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이런 전제하에 토론에 응하겠습니다.
지난 주일 가회동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이후, 저희 관구 홈페이지에 “가회동 성당”, “요한”, “신자”, “큰별” 등의 이름으로 올려진 글들을 보면서, 분노와 항의의 글이지만, 같은 교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올리신 글이라 여기고 부족하나마 답변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일차적으로 5월 31일 “가회동 성당”이름으로 올려진 글을 보고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분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요한 형제님께서 토론을 제안하셨기에 토론에 앞서 요한 형제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1) 토론은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가운데 상호간에 비방하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논의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법적으로 규정된 토론 규범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상식선에서 지켜야 할 예의나 법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의견과 다르다 할지라도 논리와 타당성이 있으면 상대방을 인정해 주기도 해야 하구요. 여기에 우리가 하는 토론은 본질적으로 성서에 바탕을 둔 복음적 토론입니다. 그러나 5월 31일자 이후에 올려진 글들과 덧글을 보면, 서로를 존중하고 평등한 입장에서 하는 신사적인 토론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토론에 앞서 먼저 요한 형제님께 요한 형제님과 관련된 글들 가운데, 지나친 표현에 대해 우선 정중하게 사과부터 하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2) 요한 형제님께서 올리신 글 가운데 “사목 헌장 구석에 있는 쓰레기 들고 와서 반박하시겠지요”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교회법 749조에 의하면, 보편(세계)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이 보편 교회를 위하여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확정적으로 고수해야 할 교리를 선언하며 교도권을 행사할 때, 주교단은 교도권의 무류성을 지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이러한 무류권을 지닌 세계 공의회 문헌입니다. 더욱이 사목헌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가장 중요한 4개의 헌장 중 하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의회 문헌은 교회법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목 헌장을 포함하여 4 개의 헌장 안에는 어디에도 “쓰레기” 같은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무류적 권위를 지니는 사목 헌장에 대해 “구석에 있는 쓰레기 들고 와서 반박”한다며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학적 토론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의회 문헌마저 공감하기 어렵다 해서 쓰레기라 여기신다면, 저의 이야기는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요한 형제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쓰레기 취급 당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 아닙니까?
또 “칼 라너가 예수요?”라고 질문을 하셨는데, 제가 올린 글 어디에 칼 라너가 예수로 언급되었습니까? 저는 간접적으로라도 그런 의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칼 라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전문위원으로 참석했고, 공의회 문헌 작성에 참여한 신학자입니다. 오늘날 칼 라너가 갖고 있는 신학적 권위는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가 갖는 권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교황님은 물론이고 많은 주교 추기경들도 라너의 신학 이론은 존중을 합니다. 발타살 같이 라너의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학자들조차 라너 신학의 위대성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이런 큰 신학자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학적 토론을 전개할 수 있습니까?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신앙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성서, 공의회 문헌, 교회법전뿐만 아니라, 이러한 근거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있도록 이끌어주는 중요한 신학자들 이론도 열려진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신앙의 커밍아웃을 요구하셨는데, 저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고, 커밍 아웃할 것도 없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요한 형제님께 요한 형제님께서 누구신지 먼저 신분을 확실히 밝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4) 저도, 요한 형제님도, 불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존중하는 마음과 열려진 마음으로 토론을 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교회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이런 전제하에 토론에 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