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가위 명절 때마다 왜 이 복음을
한가위 명절의 복음으로 뽑았을까 생각해왔습니다.
명절 분위기에 소금을 뿌리고 초를 치는 내용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추수하고 그 수확의 풍요를 누리고자 하는 부자를
하느님께서는 그날 밤에 데려가실 거라는 내용이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가위에 부자를 데려가실 거라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렇습니다.
조금은 흥청거려도 좋고, 희희낙락해도 좋을 명절,
그것도 수확을 기뻐하는 한가위 명절에 수확을 마냥 기뻐만 하지 말라하니
얼마나 한가위 명절에 안 맞는 복음, 아니 재수 없는 복음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초치는 얘기로 듣지 말고
참으로 의미가 있고 행복한 한가위란 어떤 것인지,
그것에 대해 가르침을 주는 얘기로 들어야겠지요.
탐욕만 있고 사랑이 없는 명절,
소유만 있고 나눔이 없는 명절은 명절이라고 할 수 없지요.
한 번 상상을 해보십시다.
재물을 잔뜩 싸놓고 산해진미로 가득한 상 차려 놨는데
아무도 없고 혼자 그것을 먹어야 한다면
그런 명절을 어떻게 명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명절에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사람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지내기에 명절이 더 슬픈 분들도 있지만
가족이 있는데도 혼자서 집에 있거나 여행을 간다면
그것은 공휴일을 보내는 것이지 명절을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사람이 있다면 사랑도 있어야지요.
그런데 사랑 대신 욕심이 있다면 재산이나 상속 싸움이 날 것이고,
사랑 대신 경쟁이 있다면 서로 시기 질투하고 싸우거나
그러기 싫어서 아예 명절에 오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명절에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은 두 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는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감사입니다.
먼저 기억을 보면 곡식이 무르익을 때까지
농부 자신의 땀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해, 달, 바람, 물, 흙 등 많은 것들이 있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하듯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많은 분들과 일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이번 명절에 저에게는 어떤 분들이 있나 떠올리다 보니
여러 분들이 떠올랐지만 그중에서 특히 저의 외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저의 외할머니가 1987년 한가위 전날인 9월 26일에 돌아가셨는데
올해도 그해처럼 9월 26일이 한가위 전날이라 어제 저는
외할머니를 위한 연미사를 드렸는데 그래서 더 생각이 난 모양입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푸닥거리를 하지는 않으셨지만 무당이셨습니다.
그래서일까 당신은 달이 환히 밝을 때 돌아가실 거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진짜 달이 환히 밝은 한가위 전날 돌아가셨고, 그래서
부산 봉래동 본당에서 새 사제로 사목을 하고 있던 저는
본당의 명절 미사를 봉헌하고 장례미사를 드리러 부랴부랴 올라오면서
올라오는 내내 저의 외할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며 속눈물을 흘렸습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대감댁 귀한 딸로 곱게 자란 분이셨는데
저의 외할아버지가 서울에서 횡사하시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무병을 앓다가 관운장 신이 내린 분이십니다.
푸닥거리를 하지 않고 부잣집 한 집만을 위해서 꿈을 꿔주는 무당이셨기에
산속에서 50년 이상을 도를 닦는 사람처럼 일생을 사셨고,
아들이 없으셨기에 저희들을 친 손자 이상으로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품을 받게 되면서 저의 외할머니는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할머니 생각에 한 집안에 서양 귀신과 동양 귀신이 같이 있으면
저에게 해가 올까봐 당신의 신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무병이 너무 고통스러워 신을 받아들인 분이신데
그 신을 포기하려고 하니 또 다시 무병의 고통을 겪게 되셨지요.
관운장 신을 포기하고 세례를 받기까지 6 개월 동안
저의 할머니는 너무 고통스러워 몇 번이나 포기를 하려고 하셨지만
주변 기도하는 분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세례를 받으시고,
1년 정도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손주에 대한 사랑 때문에 무병을 다시 앓고
손주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신 저의 외할머니이십니다.
저나 여러분이 지금도 누구의 사랑을 받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고 있다면
그건 제 할머니의 사랑과 같은 많은 사랑들을 통한 하느님 사랑 덕분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기억하며 살아야 하고 특히 이 명절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사랑을 기억한다면 감사가 뒤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거둔 한 해의 추수가 다 나의 노력의 결과라면 감사할 것은 없고
자기를 뻐기고, 으스대고, 자랑할 것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감사는 자기 자랑의 반대입니다.
내가 아무리 수고를 했고, 아무리 잘했다 해도
하느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대신 전하는 이웃의 사랑이 없었다면
아무 수확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감사입니다.
물론 이 가을, 이 한가위에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 감사할 것도 없고, 감사할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느님께,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분들에게 이 한가위 감사하도록 합시다.
황금빛 가을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가 태양과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함을 망각하고 자신의 땀의 결실로 만족한다면 아니되겠지요.
살면서 제 자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손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녁에 떠오르는 쟁반같이 둥근달 바라보며
밝은 마음, 풍성한 마음으로 감사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형제적 사랑으로 기쁜 추석명절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