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저는 제가 변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변하신 하느님과 달리 유한한 존재이니 변하는 게 당연하지만
저와 프란치스코와의 관계가 변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하는 것이 다 나쁘지 않고 좋게 변하는 것은 좋은 건데
안 좋은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닐까?
남녀 간의 사랑에 권태기라는 것이 있다는데
나도 권태기에 접어든 것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합니다.
10대, 20대, 30대처럼 프란치스코를 향한 열망이 강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를 알고자 하는 열망,
프란치스코를 닮고자 하는 열망,
프란치스코를 따르고자 하는 열망 말입니다.
그러기에 자주 프란치스코를 바라보고,
아주 강한 시선으로 프란치스코를 바라보던 저의 시선이
점차 약해지고 뜸해진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변한 저를 반성키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당연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사실 젊었을 때의 저의 프란치스칸 열망에는 불순물이 많았습니다.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섞인 열망이었던 것입니다.
마른 장작보다는 생나무의 불길이 더 강하고,
애욕이 순수한 사랑보다 더 강한 것처럼 보이듯
욕심이 섞인 열망이 참으로 강해 보였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의 열망은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빠지고
노년의 부부의 담담한 사랑처럼 바뀐 것도 같습니다.
노년의 부부는 ‘이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 하고
알려고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서로 잘 알고 있고,
서로 맞추고 닮으려고 애쓸 필요 없을 정도로 이미 맞춰져있고 닮아있으며,
놓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서로 안에 깊이 들어와 있지요.
또 다른 차원에서도 저의 변화를 좋게 보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를 향한 시선이 전만 못한 것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느님,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로 시선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프란치스코를 우상적으로 바라보던 것이
이제는 프란치스코가 바라보는 하느님을 보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사랑이
같이 하느님을 바라보는 사랑이듯이 말입니다.
물론 제가 성녀 글라라만큼 프란치스코를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성녀 글라라처럼 프란치스코가 보는 것을 같이 보는 것은 맞습니다.
불교의 우화 중에 이런 것이 있지요.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물이 너무 불어나 아주 위험했습니다.
여러 차례 그냥 건너려고 했지만 매번 실패했고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 타고 건널 것을 찾는데 마침 배를 발견하였고,
그 배 덕분에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사람은 강을 건너고 나서도
그 배가 너무 고마워 버리지 못하고 지고 계속 갔습니다.
배는 건너기까지만 필요한 것인데 계속 배에 집착했던 것이지요.
사실 프란치스코나 프란치스칸 영성도 하나의 배일뿐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면 버려야 합니다.
도착지에 도착하면 약도가 필요 없고 그래서 버리듯 말입니다.
성녀 글라라는 이렇게 유언에서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주셨는데
성 프란치스코가 그 길을 알려주었다고 말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알려주는 약도입니다.
약도는 길을 찾게 하고, 옳게 가게 하기에 필요하고 소중하지요.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더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