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과 희망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믿음이 있어야 희망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희망이 믿게 하는 것인가?
우리는 보통 믿음이 있어야 희망도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될 거라는 믿음이 없으면 아예 희망을 거두는 것이 우리지요.
예를 들어서, 제 주변에 말버릇이 그런 사람도 있지만
“그거 안 돼.”라는 말이 입에 붙은 사람이 꽤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기도 전에 안 된다고 믿기에
청하지도, 찾지도,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그래서 아예 어떤 시작도 하지 않게 되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안 된다고 확신을 하는데 뭘 희망하고, 뭘 청하며,
무슨 시작을 어떻게 하겠다고 문을 두드리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고 하셨지요.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예수님이시지만
그 구원을 믿는 사람과 구원자를 구원자로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바라고, 청하고,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 그래서 “안 돼.”라고 말하는 사람은
가능성을 문전박대하고, 구원을 문전박대하며,
더 나아가서 구원을 주시는 분도 문전박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잘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거나
적어도 믿음이 약한 사람이기에 진정 자신의 기도를 개선코자 한다면
근본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이렇지만 희망이 믿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희망보다는 소망이 믿게 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희망과 소망이 우리말에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소망보다는 희망이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뭣에 희망이 있다거나 희망이 보인다고 할 때 가능성 있다는 뜻이잖습니까?
그러므로 희망하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소망은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바라는 것이며
그래서 희망이 사랑보다는 믿음에 의해 견인되는데 비해
소망은 믿음보다는 사랑에 의해 견인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건 자식을 사랑하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에게 좋은 것만 있기를 바라고
사랑하는 이에게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잘 되기를 바라며
사랑하면 할수록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바라는 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어렸을 때 제 어머니가 이가 안 좋으셔서 너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이 때문에 너무 아파하시면 집안 전체가 우울하고 불안해져
이가 빨리 괜찮아지면 좋겠다고 바랐고 그래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치유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프니까, 그래서 치유되어야 하니까 치유를 바랬지
치유 가능성을 따져보고 믿었기에 치유되기를 바란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지푸라기 잡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살고픈 마음이 간절하면 지푸라기라도 도움 될 거라 믿기에 잡는 겁니다.
살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살고 싶은 소망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면
우리는 전능하실 뿐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을 믿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때 저는 치유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프니까, 그래서 치유되어야 하니까 치유를 바랬지
치유 가능성을 따져보고 믿었기에 치유되기를 바란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훅하고 제 마음에 다가오네요.
그렇습니다.
사랑에 어떻게 계산이 있을 수 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가능성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숫자와 계산만이 오고가는 지금의 세상은 아직 인간의 한계상황을 마주하지
않은 경험부족에서 오는 교만과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제 자신에게 교만과 어리석음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돌아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이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