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로마서를 계속 묵상하다 보니
어제 아침 성무일도 세 번째 시편에서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에 눈이 머물면서
그렇다면 의롭지 않은 사람은 사랑치 않는다는 말씀인가 생각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 불의하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신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건 무슨 뜻일까?
물론 지은 죄의 경중이 있고,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불의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죄인 아닌 사람이 없는데
의인만 사랑하신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기에
제 생각에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 사람이 악하고 불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든지 수행을 많이 한다든지 하여 의롭게 되고,
또는 선행이나 공로를 많이 쌓아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거저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에 대한 믿음이며
이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에 자신을 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은총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의 죄든 남의 죄든 죄만 보고 죄에 갇혀 있는 사람이며
죄에 길들여져 죄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사람이고
거듭되는 자기의 죄에 실망하여 죄에 안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은총에 의해 자기 죄를 씻음으로 의롭게 되려 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죄와 은총의 관계를 빨래를 하고 햇빛에 너는 것에 비교합니다.
우리는 더러운 옷이 더 편하다거나 더러운 채로 계속 입겠다고 하지 않고,
또 더러워질 것이니 빨래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며 포기하지도 않고
옷이 더러워지면 즉시 빨래를 하고 햇빛에 말립니다.
그런데 옷의 더러움은 이렇게 하면서 죄의 더러움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나의 죄를 깨끗이 빨래하고,
하느님 은총의 빛으로 나의 죄를 완전히 말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러운 옷을 구석에 처박아 놓는 것과 같은 것이며
옷의 더러움이 드러날까 두려워 빛 가운데로 나오지 않고
어둠속에 계속 안주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햇빛을 주시지만
죄의 더러움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빛을 싫어하고
어둠속에 계속 쳐 박혀 있는 사람은 계속 악하고,
빛을 사랑하여 자기의 죄를 빛 가운데 내다 말리는 사람은 착한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문 바깥으로 나오면 햇빛이 쨍쨍한데
어떤 사람은 게임에 빠져 방에 처박혀 있고,
어떤 사람은 햇빛이 싫다고 바깥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햇빛처럼 죄인 의인을 가리지 않지만
햇빛으로 나온 사람만이 햇빛을 쐬듯
은총으로 거저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는 사람만이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이것을 믿으며 우리는 죄에 머물지 말고 은총에로 나날이 나아가야겠습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얼마나 불안하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는지 좌불안석이었다가
3일만에 엄마에게 고백하고 회초리 한대 맞고 나니 얼마나 속이 시원하고 날아갈것 같았는지요.
죄에 머물지 않고, 은총의 햇살앞에 나부끼는 빨래처럼 살고 싶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