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도 역시 올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은총이 충만하기 위해
죄를 더 지어야 한다는 뜻으로 곡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황을 심하게 하던 10대 후반에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
아오스딩 성인의 생애를 보며
젊은 날 그렇게 방황을 하며 죄를 지었기에
하느님의 은총을 더욱 뜨겁게 체험하고 큰 성인이 된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도 젊은 날 한 번쯤은
방탕의 구렁텅이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에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어지는 6장 1절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요.
“은총이 많아지도록 우리가 계속 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또 다른 곡해도 조심해야 합니다.
죄가 적은 곳보다 많은 곳에 은총이 더 많이 내린다고 말입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은 은총에 있어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은총의 차이는 없지만
하느님 은총을 사람이 느끼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똑 같이 사랑하는데 어떤 사람은 더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덜 감사하고,
열 사람의 나병환자가 같이 치유를 받았지만
이방인 한 사람만 감사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던가요?
그러니까 죄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은총이 풍성한 것입니다.
반대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은총이 풍성치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Amazing Grace(놀라운 은총)라는 노래 가시가 있지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죄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은총을 받기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고,
은총을 받기에 부당하다고 생각하기에 은총이 너무 크고 넘치는 것이지요.
그러니 누가 은총을 살겠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이런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자기 잘난 줄 알고 사는 것이 행복할까요,
은총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할까요?
참으로 놀랍게도 신앙인 중에도 은총을 살기보다
자기의 의로움으로 만족하며 살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지요.
머리로는 은총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지만
순간순간 제가 한 일에 대해서 흡족해 하고는 합니다.
자기 흡족과 은총의 만족 사이에 나는 어디쯤 있을까?
오늘 말씀은 이것을 성찰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