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두 가지 인간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죄의 종>과 <순종의 종>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기서 죄의 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을 흔히 쓰는 죄의 노예라는 말로 바꿔 써도 될까요?
그리고 우리보고 죄의 노예라고 하면 느낌이 어떨까요?
맞아! 나는 죄의 노예야!
이럴 분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죄의 노예는 아니라고 할 것이고
아무도 죄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적어도 죄의 노예는 되고 싶지 않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죄의 노예입니다.
그렇습니다.
노예란 일반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죄의 노예만은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죄란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유를 누리려다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자유의 본성 때문에 자유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고,
자기 마음대로 함으로써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되
사랑을 따라 하면 순종의 종이 되는데
욕망을 따라 하면 죄의 종 또는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도 있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욕망을 따를 수도 있는 거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플 때 자기 배를 채우는 것처럼
욕망의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자기 사랑이긴 합니다.
그런데 나란 욕망의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나도 있는 것이고,
자유의지도 욕망을 채우려는 자유의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려는 자유의지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욕망은 이 세상을 살게 하고 사랑은 영원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앞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데
누구나 그 원수, 즉 육체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유의지가 욕망을 따르다가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사랑을 따라 주님의 종이 되도록 육체를 다스리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