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1주일
회개의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죄를 깊이 들여다보고 거기서부터 돌아서는 시기지요.
그러니 이 시기를 잘 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이전에 죄를 들여다보는 것이 우선 쉽지 않고
죄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싫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서 저는 앞마당 청소를 하는데
며칠 전 아침에 나가보니 누가 수도원 앞마당에다 똥을 싸놓았습니다.
그것도 조금이 아니고 풍성히 싸놓았습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수도원 앞마당에 감히 똥을 싸놓았어!”하고
푸념하다 “싸기도 많이 쌌군!”하며 똥을 치웠습니다.
푸념을 할 때는 약간의 분노 같은 것이 있었는데
“싸기도 많이 쌌군!”하는 순간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나오면서
그 사람 처지가 상상이 되고 이해되었습니다.
“오죽 급했으면 수도원 앞마당에다가 싸기까지 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더 했습니다.
사람들이 먹을 때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음식을 들여다보고 연구하고 맛을 음미하고 평가하면서도
먹고 나온 것은 왜 천대하고 쳐다보기도 싫어하는지.
우리 인간은 이렇게 남의 똥은 물론이고
자기 똥마저 천대하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똥에 대해 우리가 좋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사실 한 번 잘 생각해보면 정말로 고마운 똥입니다.
우선 이 똥이 안 나왔으면 어떻게 할 뻔 했습니까?
변비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하고
관장을 하느라 야단을 떨어야 할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음식이 똥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고
나무에 유익한 거름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똥을 천대하는 것은 빼먹을 것 다 빼먹고 구박하는 야비함이고
은혜를 악으로 갚는 배은망덕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자기가 저지르고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양
우리는 죄를 덮어놓고 보기 싫어하고 혐오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똥은 치워야 없어지지 덮어놓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덮어놓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치운다고 근본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합니다.
음식을 먹는 한 똥은 욕구충족의 배설물로 계속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 맛있기에 우리는 식욕이 댕기고,
식욕이 댕기기에 먹고, 먹기에 먹은 것의 배설물인 똥이 생기는 것처럼
죄도 욕구충족의 배설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좋은 것이기에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기에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는 유혹자의 탓이 아닙니다.
이것은 식욕 때문에 먹고 음식이 맛있어서 먹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 탓을 맛있게 음식 만든 사람에게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죄는 유혹자의 탓이 아니라
좋은 것을 탐하는 우리의 욕심이 그 탓입니다.
배가 부르면 아무리 맛있어도 유혹이 되지 못하고 배고픈 사람,
그래서 식욕이 댕기는 사람이 유혹 당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러운 과일나무를 주셨고
하와가 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보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때 탐스러운 것을 탐하는 인간의 잠재된 욕심을
뱀이 일깨운 것일 뿐이고
하느님처럼 온갖 선을 갖고자 하는 잠재된 욕심을
뱀은 그저 일깨운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욕심대로 좋아하는 것, 곧 선을 취하니
싫어하는 것, 곧 악이 나왔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는데 싫어하는 똥이 나온 것과 같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께서 권고 2번에서 말씀하시듯
선을 취하였는데 악이 나옵니다.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였는데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주님은
성령의 인도로 유혹을 받으셨지만 이겨내십니다.
빵의 유혹,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물리치시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내세우라는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처럼 되려하기보다는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섬기겠다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유혹의 정체를 간파하시고 물리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를 유혹하는 좋은 것이 죄악의 근원이 아니고,
좋은 것을 탐하는 욕심이 죄악의 근원임을 성령으로 깨달아 알고
성령 충만으로 다른 것을 더 바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회개의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죄를 깊이 들여다보고 거기서부터 돌아서는 시기지요.
그러니 이 시기를 잘 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이전에 죄를 들여다보는 것이 우선 쉽지 않고
죄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싫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서 저는 앞마당 청소를 하는데
며칠 전 아침에 나가보니 누가 수도원 앞마당에다 똥을 싸놓았습니다.
그것도 조금이 아니고 풍성히 싸놓았습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수도원 앞마당에 감히 똥을 싸놓았어!”하고
푸념하다 “싸기도 많이 쌌군!”하며 똥을 치웠습니다.
푸념을 할 때는 약간의 분노 같은 것이 있었는데
“싸기도 많이 쌌군!”하는 순간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나오면서
그 사람 처지가 상상이 되고 이해되었습니다.
“오죽 급했으면 수도원 앞마당에다가 싸기까지 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더 했습니다.
사람들이 먹을 때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음식을 들여다보고 연구하고 맛을 음미하고 평가하면서도
먹고 나온 것은 왜 천대하고 쳐다보기도 싫어하는지.
우리 인간은 이렇게 남의 똥은 물론이고
자기 똥마저 천대하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똥에 대해 우리가 좋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사실 한 번 잘 생각해보면 정말로 고마운 똥입니다.
우선 이 똥이 안 나왔으면 어떻게 할 뻔 했습니까?
변비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하고
관장을 하느라 야단을 떨어야 할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음식이 똥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고
나무에 유익한 거름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똥을 천대하는 것은 빼먹을 것 다 빼먹고 구박하는 야비함이고
은혜를 악으로 갚는 배은망덕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자기가 저지르고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양
우리는 죄를 덮어놓고 보기 싫어하고 혐오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똥은 치워야 없어지지 덮어놓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덮어놓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치운다고 근본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합니다.
음식을 먹는 한 똥은 욕구충족의 배설물로 계속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 맛있기에 우리는 식욕이 댕기고,
식욕이 댕기기에 먹고, 먹기에 먹은 것의 배설물인 똥이 생기는 것처럼
죄도 욕구충족의 배설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좋은 것이기에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기에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는 유혹자의 탓이 아닙니다.
이것은 식욕 때문에 먹고 음식이 맛있어서 먹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 탓을 맛있게 음식 만든 사람에게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죄는 유혹자의 탓이 아니라
좋은 것을 탐하는 우리의 욕심이 그 탓입니다.
배가 부르면 아무리 맛있어도 유혹이 되지 못하고 배고픈 사람,
그래서 식욕이 댕기는 사람이 유혹 당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러운 과일나무를 주셨고
하와가 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보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때 탐스러운 것을 탐하는 인간의 잠재된 욕심을
뱀이 일깨운 것일 뿐이고
하느님처럼 온갖 선을 갖고자 하는 잠재된 욕심을
뱀은 그저 일깨운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욕심대로 좋아하는 것, 곧 선을 취하니
싫어하는 것, 곧 악이 나왔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는데 싫어하는 똥이 나온 것과 같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께서 권고 2번에서 말씀하시듯
선을 취하였는데 악이 나옵니다.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였는데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주님은
성령의 인도로 유혹을 받으셨지만 이겨내십니다.
빵의 유혹,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물리치시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내세우라는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처럼 되려하기보다는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섬기겠다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유혹의 정체를 간파하시고 물리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를 유혹하는 좋은 것이 죄악의 근원이 아니고,
좋은 것을 탐하는 욕심이 죄악의 근원임을 성령으로 깨달아 알고
성령 충만으로 다른 것을 더 바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