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지혜서의 말씀은 제가 아주 공감을 많이 하는 말씀,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지혜서 말씀 중의 하나로서
정결을 우리가 왜 잘 살기 어려운지를 얘기해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지혜서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 때문에
정작 그것을 만드신 하느님을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이 하느님의 작품들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해가 되면서도 안 되기도 하는 내용이지요.
왜냐면 요즘처럼 단풍이 아름다울 때 우리는 즉시 하느님 찬미를 하잖아요?
지금 저희 수도원은 가을 아름다움이 절정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많이도 아니고 딱 두 그루의 나무 때문입니다.
하나는 은행나무고 다른 하나는 느티나무인데
지금 이파리의 색깔들이 가장 그 색깔답게 물들어 있어서
즉시 ‘이것은 진정 천상적이다.’고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제 창으로 내다보면 즉시 ‘아, 하느님!’이 저절로 튀어나오게 됩니다.
제가 이러하니 프란치스코는 얼마나 더 그랬겠습니까?
토마스 첼라노는 자연을 통한 그의 하느님 관상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창작가이신 그분을 찬미하였다.
그는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모든 사물이 그에게는 선이었고, 그분의 발자국이 서려 있는 사물들을
통하여 그는 어디서나 사랑이신 그분을 따라갔다.
그는 모든 사물에서 사다리를 만들어 그 사다리를 밟고 옥좌로 올라갔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을 보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단풍놀이는 가서 아름다움을 보지만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기에 주일 미사도 빼먹는 사람이 있지만
오늘 지혜서 말씀처럼 하느님을 찾고 있으면서도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지요.
그러나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는 하느님 관상을 잘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을 통해서는 하느님 관상을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런 가능성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지혜 13,6-7)
저도 그런 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10대 후반이었는지 20대 초반이었는지 저녁 인천 가는 전철 안이었습니다.
거기에 어떤 여인이 저와 거리를 두고 서 있었는데
아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느낌은 너무도 아득할 정도였는데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한 순간이었지만 진정 성욕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 때문에도
한 여인이 하느님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정말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때는 정말 그녀가 하도 아름다워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런 저를 보고 너무 놀랐고,
그때 이후에는 그런 여자를 못 만나서 그런지 몰라도
아름다운 여인들 안에서 하느님을 안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안 보이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을 텐데!
어떤 때는 이런 생각도 하였지요.
이 아름다운 가을,
너무도 아름다운 가을을 보며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을 봅니다.
자비의의 하느님김레오나르도 님께 영육간 건강을 허락 하사 그 직분과 소명을다 할 수 있게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