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군중이 가엽구나. 사흘이나 굶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우리가 잘 알다시피 빵의 기적에 대한 얘기는 복음에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고 다른 하나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인데
오늘 복음인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해봤지요.
루카와 요한의 복음에서처럼 왜 한 번만 나오지 않고 두 번이나 나올까?
정말 기적이 두 번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루카와 요한의 복음은 한 번만 기록했을까?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기적이 실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고도 하고,
실제 있었던 사건일지라도 기도에 의한 기적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어놓음이 가지고 있던 다른 이들의 것도 내놓게 만든,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으킨 사랑의 나눔의 기적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비교하여 보면 좋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두 기적의 형식은 거의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수천의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굶주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을 모두 먹이시는데 소량의 빵과 물고기가 모두 먹이고도 남습니다.
그렇지만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사천 명을 먹이신 곳은 산 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루가 아니라 사흘이나 굶었고
주님께서 제자들이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먹이고자 하십니다.
우선 산 위라는 것을 우리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와 연결시켜 볼 때 산이란 하느님의 산입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그러니까 주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시고 주린 이들을 먹이신 것은
그저 인간적인 사랑의 발로가 아니라 이사야서가 예언한
그 하느님 나라의 구현이요 구원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인간적인 사랑에서 먹을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저희가 노숙자들에게 무료 급식을 하고,
북한의 굶주리는 동포에게 인도적인 식량 지원을 하는데
그것을 그저 인간적인 사랑에서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그것이 그저 인도적인 지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하는 것이 되게 해야 하지요.
다음으로 사흘이나 굶었다는 내용입니다.
사흘이나 굶었다는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이 병을 치유 받고도
주님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산위에 머물렀다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사람들도 병의 치유만 받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 받은 얘기의 경우
아홉 명의 이스라엘 병자는 치유만 받고 돌아와 감사드리지 않는데
사마리아 사람만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림으로써 이 사람에게는
육신의 치유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사람들이 그저 병만 치유 받은 게 아니라 구원을 받은 거라는 얘깁니다.
우리도 병만 치유 받으려하지 말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지요.
세 번째로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먹이고자 하신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먹이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청하거나 보채기 전에 당신이 먼저 주고자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거나 떼를 쓰지 말고
마치 어린아이가 먹을 때가 되면 어련히 먹이시는 어미의 사랑처럼
어련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도 이 대림절 믿고 기다리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