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고다이버 백작 부인 Lady Godiva (1898)
작 가 : 죤 콜리어(John Collier) 1850- 1934
크 기 : 캠퍼스, 유채 : 142.2 X 183cm
소재지 : 영국 런던 허버트 미술관
작년 12월 8일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특별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자비의 얼굴”이라는 칙서를 반포하셨다.
크리스찬들에게 있어 하느님 자비의 강조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나, 그동안 제도적인 교회가 자기 조직 유지와 강화에 너무 신경을 쓰노라 소홀히 했던 부분에 대한 강조이기에 더욱 시사적인 차원에서 의미 있는 것이다.
그 동안 교회는 죄와 벌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강조하다보니 하느님의 자비 표현에 등한했던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교회가 만든 신조와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파문이라는 벌로 축출함으로서 교회를 정화코자했고, 자신의 약함이나 피할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이혼을 한 사람에게 대해선 조당이라는 벌로 혼인과 부부생활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다.
현대 심리학의 발달로 본인의 성향과 무관한 유전적 요인으로 밝혀진 동성애자에 대한 단죄의 태도 등은 교회가 조직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고육책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자비의 모습을 보이는 것과 거리가 먼 것은 사실이다.
교종께서는 이 희년에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라는 성서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교회 안에 새롭게 증거 되어야 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강조를 하셨다.
그 동안 가톨릭교회는 엄정한 법에 의해 움직이는 위계질서가 분명한 종교 집단의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이런 와중에 자비로운 하느님을 증거 하는 종교로서의 모습의 부각에는 그리 성공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느님의 자비 보다 더 앞선 것을 교회가 강조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실재적으로는 바리사이즘에 빠지게 마련이다.
이번 희년 선포 칙서에서도 “바리사이들과 다른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준수한다면서 그저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하느님의 자비를 가렸습니다. 율법 준수의 권유가 인간 존엄에 대한 배려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조하셨다.
이 회칙은 성서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비의 실천에 대한 구체적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들과 나누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58: 6- 8)
이 작품은 우리 안에 정착된 성화의 개념으로 보면 생경스러운 것이다. 젊은 여인이 나체의 모습으로 말을 타고 있는 것은 인간의 관음증을 부추기는 통속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작품은 하느님 자비 체험을 심화시켜야 하는 희년의 의미성을 구체화시키는 데 참으로 귀중한 자료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영국이 가장 번성했던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여왕 시절, 유럽 전역에 퍼지고 있던 신 고전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신 고전주의는 그전 시대까지 유행하던 복잡한 로코코(Rococo)영향에서 벗어나 고귀한 위대함과 고요한 단순함이라는 고대의 이상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작품은 11세기경 잉글랜드 중부지방의 코벤트리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을 그린 것이다.
그 곳 영주였던 레오프릭은 자기 수하에 있는 농노나 소작인들에게 지나친 세금을 거둬 드리면서 그들의 생계를 압박하는 비참한 현실이었으나 그의 힘이 너무 막강하기에 아무도 이런 조치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엉뚱하게도 영주의 부인이 반기를 들었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16세였으며, 대단한 미모였다.
그녀는 남편인 영주의 과중한 세금은 가난한 사람들의 가정을 파괴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니, 인도적 차원에서 세금을 낮추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재물에 눈독을 들인 남편은 아내의 이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엉뚱한 장난기 어린 제안을 한다.
“당신의 가난한 농노나 소작인들에 대한 사랑이 진심이라면 그 사랑을 몸으로 표현해봐라. 만약 당신이 완전한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면 세금감면을 고려하겠다.” 라며 빈정거렸다.
영주 부인은 비록 어린 나이의 여인이나, 복음에 바탕을 둔 깊은 인간애를 지닌 여인이었기에, 농노들을 비참한 가난에서 건져내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영주의 제안대로 나체로 말을 타고 영지를 돌기로 했다.
젊은 영주 부인이 자신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알몸으로 영지를 돈다는 소문을 접한 농노들은 그 깊고 순수한 마음에 감동하여 영주 부인이 벗은 몸으로 영지를 돌때, 누구도 그 알몸을 보지 않기로 하고 집집마다 문과 창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내려서 영주 부인의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는 감동을 기억하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
“이 영주 부인의 과감한 자비심의 표현은 단순히 부담스러운 세금에 허덕이는 농노들의 근심만 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역사 안에서 새로운 단어를 창출했다.”
부패와 모순을 깨트리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고집스럽게 지키고자 하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관습과 상식을 깨는 정치 행동을 ‘고다이버이즘'(godivaism)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당시 중세 여성 문화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역설논리로 시위했던 영주 부인의 전위적 결단과 태도에서 기인된 것이다.
나체 특히 여성의 나체는 예술적 감각의 표현이라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특히 종교에서는 엄격한 금기에 속한 영역이었다.
성서적 내용의 표현에 있어서도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사건이나, 구약의 다니엘서에 나타나고 있는 수산나의 사건 정도에나 등장할 수 있던 내용이었고 금기사항에 가까울 만큼 다루지 않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복음적 자비에 깊이 심취한 부인은 비참한 현실에 머물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당시 정서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나체 시위를 함으로서 이들을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생경스러움으로 다가오는 이 백작 부인의 나체는 교황님의 칙서에 나타나고 있는 자비의 그 시대 상황에서의 구체적이며 정확한 표현이다
“마리아의 노래”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구절을 연상시킨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 루카 1: 54 – 56)
시대 착오적인 관행과 법에 묶여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 어떤 때 생경스럽게 여겨지는 교회 현실에서 교종께서는 여러 반대 의견과 냉소적인 태도 가운데서도 예언자적인 과감한 자세로 모든 크리스챤들을 하느님 자비 실천으로 초대하고 있는 이때에 이 작품은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하기 위해 크리스챤들이 지녀야 할 과감한 도전적 태도를 알리고 실천을 격려하는데 큰 자극제가 될 수 있다.
“교회는 복음의 뛰는 심장인 하느님의 자비를 알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자비가 모든 이의 마음과 정신에 가 닿아야 합니다.”
(희년 칙서 12항)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말씀은 예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한 자비심을 보이기 위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시는데, 이 작품은 바로 크리스챤의 자비 표현은 예수님의 자비를 증거 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의 표현이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을 가장 중시하며 '생의 철학' 을 주장한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년 ~ 1941년)이라는 철학자는 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종교에는 고정적인 제도를 전통으로 여기며 유지되는 것과 개방적인 종교가 있는데, 전자는 그 폐쇄적인 성격 때문에 시대 적응에 실패해서 역사에 뒤안길로 사라지게 마련이나, 후자는 그 개방적인 성격때문에 시대 문화와 정서에 적응하면서 계속 생명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종교로 존재할 수 있다.
우리 가톨릭 교회가 세상 안에서 생명을 주는 희망의 종교로 제시되기 위해선 개방적 종교의 모습으로 변모되어야 하고 이 작품은 하느님 자비의 개방적인 표현이라는 면에서 자비의 희년을 준비하는 우리 교회에 더 큰 힘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