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의 사무엘기는 한나에 대한 얘기인데
한나는 하느님의 사람 사무엘을 낳은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사람을 낳는 사람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우선 한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가련한 사람으로서의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니까 한나는 가난한 사람도 아니고
당시 가장 불쌍한 사람 중의 하나인 과부도 아니며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자식을 낳을 수 없기에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당시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자는 단지 자식이 없어서 불행한 여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태를 열어주지 않으셔서 못 낳는 것이기에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못 받은 여자, 그래서 과부보다도 불행한 여자였지요.
그래서 어제 사무엘기에서도 이렇게 얘기했지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놓으셨음으로”(1,6)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불임은
그저 한 여자의 생물학적 불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에는 분명 조심해야 할 점이 있지요. 뭔고 하면
하느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으셨다는 말씀을 일반화하여
불임여성은 모두 하느님께서 복주시지 않은 거라고 이해해선 안 되고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믿음의 표현으로 이해해야한다는 뜻이요
생명의 탄생이란 인간이 감히 그리고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이해해야한다는 뜻이지요.
아무튼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이
생명의 하느님을 가장 간절하게 찾기에
세상 그 어느 여인보다 가장 간절히 기도하는 여인이 되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람을 낳는 가장 복된 여인도 됩니다.
오늘 사무엘기는 한나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는지도 보여줍니다.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한나는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많은 경우 시늉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혼자 조용히 명상할 곳으로 성당이나 기도 방을 찾고,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면하고 있으며
하느님께 자기 마음을 털어놓거나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서 독백하거나 푸념을 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났는데도 아무런 하느님 체험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했는데도 하느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보통 징징거리는데
하느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은 것이며
하느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데도 못 듣는 겁니다.
그리고 한나는 또한 자기의 감정과 마음과 일치하여 기도하는데
우리는 많은 경우 그렇지 않고 그래서 진실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께는 찬미와 감사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고상을 떨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 내 마음에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는 없고
사람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가득하거나 세상 걱정근심이 가득하다면
어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한나처럼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진실한 기도입니다.
분한 마음과 슬픈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한나처럼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털어놓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