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
오늘 이 말씀은 시편 8편을 생각나게 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5절)
그런데 시편 8편은 인간 전체를 두고 하는 찬미라면
오늘 다윗은 조금 좁혀서 찬미를 드리는 듯합니다.
다윗 자신과 자기 집안을 들어서 찬미들 드리고,
조금 더 넓혀봐야 이스라엘을 들어서 찬미 드리는 듯합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제 생각에 그런 면이 없다고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다윗과 다윗 집안만 편애하신 겁니까?
사울과 사울 집안과 비교하면 편애하신 것이 확실한 것 아닐까요?
사울도 죽고 요나단도 같이 죽었으니 멸문당한 것이 아닙니까?
하느님이 편애를 하실 리는 없다고 우리가 믿을 때
하느님이 편애를 하셔서 다윗이 그런 찬미를 드린 것이 아니고,
자기와 자기 집안이 특별히 은혜를 입었다고 다윗이 느끼는 거지요.
이런 것은 우리도 본받을 점이 있습니다.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 말입니다.
우월감에서 특별한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 때문에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느끼는 것 말입니다.
성인들이 다 이런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같으면서도 다르고
보편적이면서도 사람마다 특별하신데 성인들은 이것을 느낍니다.
하느님은 죄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비와 해를 주시듯
질과 양에서 차이가 나게 사랑을 주시지 않지만
각기 다른 사랑을 각각에게 주십니다.
사람이 다 다르듯 사랑도 다른 것입니다.
물이 그릇의 모양대로 담기고 크기대로 담기는 것과 같습니다.
각기 다른 사랑이 바로 은사, 곧 Charisma입니다.
은사는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르게 주어집니다.
아무에게도 은사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고,
은사는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은사는 다 다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 말씀하시듯 은사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지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손이 발과 달리 무엇을 잘 집을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은
손을 위해서만 받은 것이 아니라 몸에 봉사하기 위해서이고,
귀가 소리를 듣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있는 능력을 받은 것은
귀가 자기만 호사하라고 받은 것이 아니라 몸에 봉사하기 위해서지요.
다윗은 집안을 위해서 있고,
다윗 집안은 하느님의 집을 위해서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의 집안도 하느님의 집을 위해서 있습니다.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고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소명을 주셨음을 되새기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