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누가 진정 의인인가 생각게 합니다.
왜냐면 오늘 주님께선 의인과 죄인을 대비하며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셨으니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의인인 것처럼 우리는 생각할 수 있고,
죄인 몇은 부르시고, 의인 여럿은 팽개치시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런데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의인이 어디 있습니까?
시편에서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하나도 없구나.”(14,3)
그리고 바오로 사도도 로마서 3장 12-3절에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모두가 본래 죄인이지만 의롭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차별 없는 주님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 인간에게 요구되고 필요한 것은 이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3장 22-4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해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의 얘기와 연결시키면
레위처럼 주님의 부르심을 믿고 따르면 의인이 되고,
율법학자들처럼 불신을 하면 마냥 죄인으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첫 번째 기준은 주님을 믿고 따름이고,
이 기준을 따를 때 율법학자와 바리사이가 아니라 레위가 외려 의입입니다.
두 번째 기준은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이사 58,12)
하느님 보시기에 의인은 하느님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복구하는 이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이 기준이 아닌 율법을 기준 삼아
자기들은 의인이고 다른 이들, 특히 세리들은 죄인아라고 하며
그들을 차별하고, 단죄하고, 내치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같이 거짓 의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하느님 백성을 내쳐 흩어지게 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파괴하지만
참 의인들은 그들이 쫓아낸 이들을 불러옴으로써
그들에 의해 파괴된 하느님 나라를 재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종합을 하면 참 의인이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요,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흩어진 이웃을 주님께 모으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요.
여기서 저는 모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그분이 내건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표어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경외敬畏하고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분이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평가가 갈리겠지만
그 표어만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잘 담고 있어서
제가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표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이 짧은 말을 입술에 올리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