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복음에만 나오는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이름이 없고, 거지에게는 외려 이름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반대지요.
서울 역에 있는 사람은 이름이 없고 그저 노숙인지만
부자 이건희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을 사람들이 다 알지요.
그런데 서울 역 노숙인에게 왜 이름이 없습니까?
이름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모르고 그래서 불러주지 않을 뿐이지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유명하고 누구나 이름을 다 아는 부자가
천국, 곧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름이 없습니다.
왜? 천국에는 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시, 그는 왜 천국에 없습니까?
죽고 난 다음 그가 천국에 없는 이유가
부자는 “살아있는 동안에 좋은 것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복음은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부자였다는 이유만으로, 곧 좋은 것을 다 누렸다는 것만으로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없고 지옥에 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천국에 가고 못 가고의 기준이 <부자냐 아니냐?>입니까?
그런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부자라서 천국에 못 가는 것이 아니라
부자는 천국을 원치 않기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고,
부자가 천국을 원치 않은 것은 이 세상이 제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만방자한 사람을 일컬어 ‘모두가 지 세상이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이 전부 자기 것인 양 산다는 뜻이 있기도 하지만
이 세상이 자기가 사는 세상의 전부이고,
자기가 살아야 할 세상의 전부인 양 산다는 뜻도 있지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을 가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기에 하느님이 필요 없고,
그래서 그에게는 하느님이 안 계십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이라는 분은 씨알도 안 먹히는 존재지요.
그래서 하느님과 완전한 단절이 이뤄지는데
관계나 통교가 있다가 끊어진 단절이 아니라
아예 아무런 통교나 관계가 없었던 단절입니다.
결과적인 단절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원천적인 단절이라는 얘깁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관계는 끊어진 관계가 아니라
관계라는 것이 아예 없었던 관계입니다.
라자로라는 사람이 그에게는 있어도 없었던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무시無視하는데
무시를 그대로 뜻풀이를 하면 없을無에 볼視,
그러니까 보는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있는데도 없는 양 보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력이 떨어져서 못 보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투명인간인 양, 없는 존재인 양 여기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주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부자는
모든 것을 가진 것 때문에 하느님도 사람도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당연히 하느님 나라, 천국에는 없는 사람이며
오늘 독서 예레미야서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