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2주일(가해)
지난 주 우리의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혹독한 시련을 당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기적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이라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영광스런 변모를 하시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 선포되십니다.
그러니 1주와 오늘 2주를 연결시켜 보면
주님께서는 광야의 혹독한 시련과 악마의 유혹을 이겨냄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당신의 사랑받는 아드님이심이
선포되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챔피언의 영광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백조의 우아함도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백조가 우아하게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유유히 물을 헤엄쳐 가는 것 같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는 발이 쉴 새 없이 물을 젓고 있고
발레리나가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백조의 호수를 연기하지만
까치발로 자유자재로 걷고 뛰고 도약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아가씨의 아름다운 발이 굳은살로 흉측하게 될 정도로
피나는 훈련을 해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매주 치매 노인들이 대부분인 노인 요양원에 가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런데 연세가 높으니 치매뿐 아니라 갖가지 병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들 중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지니신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제가 손을 잡아드리면 홀딱 반할만한 미소를 지으시는데
그 아름다움은 아가씨의 그 싱싱한 아름다움도 아니고
성적으로 원숙하고 농염한 부인의 아름다움도 아닙니다.
온갖 고통과 풍상을 다 겪은 분의 아름다움이고
지금도 많은 고통이 있음에도
고통마저도 끌어안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이고
어떤 고통에도 존재가 흔들리지 않는 품위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주님의 그 영광스런 얼굴도 이 할머니처럼
금이 불로 정련이 되어 빛나듯
고통으로 정련되어 빛나는 얼굴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광채는 무엇보다도
감추였던 빛의 본색이 드러난 광채입니다.
필리비서 2장이 얘기하듯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해 신적 광채를 감추신 분이십니다.
이는 마치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 얼굴이
너무도 빛나하느님과 만날 때는 너울을 벗지만
사람들과 만날 때는 너울로 가린 것처럼
주님도 인간이 되어 오실 때에는 신적 광채를 감추신 것입니다.
그러나 악마가 아무리 유혹해도 감추셨던 신적 광채를
오늘 드러내십니다.
시나이산을 오른 모세처럼 타볼산에 오르셔서 하느님을 만나실 때와
하느님을 만난 모세와 엘리아와 대화할 때는 본색을 드러내신 겁니다.
그러니 주님 얼굴의 광채는 빛이신 하느님과 기도로 깊이 일치하신
빛이신 그리스도의 본색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본색은 위선으로 감추었던 죄악의 어둠이지만
주님의 본색은 우리 인간의 죄와 모욕과 천시로 가렸던 빛이십니다.
그럼 주님께서는 악마가 그렇게 드러내라 해도 감추었던 당신의 본색을
오늘 타볼산에서 왜 드러내신 것일까요?
타볼산에 오르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카이사르의 필리비 지방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 하는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예수께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사람들 사이에서 분분하였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셨고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고 대답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주님의 본색을 드러내자 주님께서는 즉시
이에 대해 입다물라하시고
오히려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하십니다.
타볼산의 변모는 주님의 수난의 이 첫 번째 예고와
두 번째 예고 사이의 사건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어서 주님께서는 처참한 수난을 당하실 것이고
제자들은 자기들이 따랐던 주님이 돌아가심으로 빛을 잃게 될 것이고
절망할 것입니다.
이때를 대비하여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사실임을 타볼산 성부의 음성으로 확신시켜주시는 겁니다.
세례 때처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장엄하게 선포하시지만
타볼산에서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고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을 들어야 할 너희는 누구입니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고 그리고 우리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중요한 때 주님께서 따로 데리고 간,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은 제자들입니다.
중요한 때란 회당장의 딸을 되살릴 때,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
그리고 오늘 타볼산에서 변모하실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의 당신도 보여주시고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에 번민하시는 약함도 보여주시고
그렇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당신의 본색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을 보고 두려워 떨듯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주님의 변모와 하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떨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이고
우리에게도 들으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부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주님께서도 당신의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들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안겨주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에 짓눌리고, 찌부러지지 말고 일어나라.
두려워하지도 마라.
두려워하면 십자가가 더 커지고 무거워진다.
두려워하지 말고 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두려움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느니 나의 사랑으로 두려워하지 마라.
오직 나의 사랑만을 생각하여라.
이렇게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 우리의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혹독한 시련을 당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기적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이라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영광스런 변모를 하시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 선포되십니다.
그러니 1주와 오늘 2주를 연결시켜 보면
주님께서는 광야의 혹독한 시련과 악마의 유혹을 이겨냄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당신의 사랑받는 아드님이심이
선포되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챔피언의 영광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백조의 우아함도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백조가 우아하게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유유히 물을 헤엄쳐 가는 것 같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는 발이 쉴 새 없이 물을 젓고 있고
발레리나가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백조의 호수를 연기하지만
까치발로 자유자재로 걷고 뛰고 도약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아가씨의 아름다운 발이 굳은살로 흉측하게 될 정도로
피나는 훈련을 해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매주 치매 노인들이 대부분인 노인 요양원에 가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런데 연세가 높으니 치매뿐 아니라 갖가지 병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들 중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지니신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제가 손을 잡아드리면 홀딱 반할만한 미소를 지으시는데
그 아름다움은 아가씨의 그 싱싱한 아름다움도 아니고
성적으로 원숙하고 농염한 부인의 아름다움도 아닙니다.
온갖 고통과 풍상을 다 겪은 분의 아름다움이고
지금도 많은 고통이 있음에도
고통마저도 끌어안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이고
어떤 고통에도 존재가 흔들리지 않는 품위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주님의 그 영광스런 얼굴도 이 할머니처럼
금이 불로 정련이 되어 빛나듯
고통으로 정련되어 빛나는 얼굴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광채는 무엇보다도
감추였던 빛의 본색이 드러난 광채입니다.
필리비서 2장이 얘기하듯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해 신적 광채를 감추신 분이십니다.
이는 마치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 얼굴이
너무도 빛나하느님과 만날 때는 너울을 벗지만
사람들과 만날 때는 너울로 가린 것처럼
주님도 인간이 되어 오실 때에는 신적 광채를 감추신 것입니다.
그러나 악마가 아무리 유혹해도 감추셨던 신적 광채를
오늘 드러내십니다.
시나이산을 오른 모세처럼 타볼산에 오르셔서 하느님을 만나실 때와
하느님을 만난 모세와 엘리아와 대화할 때는 본색을 드러내신 겁니다.
그러니 주님 얼굴의 광채는 빛이신 하느님과 기도로 깊이 일치하신
빛이신 그리스도의 본색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본색은 위선으로 감추었던 죄악의 어둠이지만
주님의 본색은 우리 인간의 죄와 모욕과 천시로 가렸던 빛이십니다.
그럼 주님께서는 악마가 그렇게 드러내라 해도 감추었던 당신의 본색을
오늘 타볼산에서 왜 드러내신 것일까요?
타볼산에 오르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카이사르의 필리비 지방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 하는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예수께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사람들 사이에서 분분하였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셨고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고 대답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주님의 본색을 드러내자 주님께서는 즉시
이에 대해 입다물라하시고
오히려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하십니다.
타볼산의 변모는 주님의 수난의 이 첫 번째 예고와
두 번째 예고 사이의 사건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어서 주님께서는 처참한 수난을 당하실 것이고
제자들은 자기들이 따랐던 주님이 돌아가심으로 빛을 잃게 될 것이고
절망할 것입니다.
이때를 대비하여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사실임을 타볼산 성부의 음성으로 확신시켜주시는 겁니다.
세례 때처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장엄하게 선포하시지만
타볼산에서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고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을 들어야 할 너희는 누구입니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고 그리고 우리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중요한 때 주님께서 따로 데리고 간,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은 제자들입니다.
중요한 때란 회당장의 딸을 되살릴 때,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
그리고 오늘 타볼산에서 변모하실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의 당신도 보여주시고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에 번민하시는 약함도 보여주시고
그렇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당신의 본색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을 보고 두려워 떨듯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주님의 변모와 하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떨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이고
우리에게도 들으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부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주님께서도 당신의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들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안겨주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에 짓눌리고, 찌부러지지 말고 일어나라.
두려워하지도 마라.
두려워하면 십자가가 더 커지고 무거워진다.
두려워하지 말고 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두려움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느니 나의 사랑으로 두려워하지 마라.
오직 나의 사랑만을 생각하여라.
이렇게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