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 1 독서를 보면 법, 규정, 법규라는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이 말들이 법적인 용어로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법규로 정한 것을 규정規定이라고 하지 않을까 제 식대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규정대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를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규가 정하는 대로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것이 제 생각에 양면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멋대로 하지 않고 법규대로 할 때는 좋은 의미이지만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지 않고 법에 매일 때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도 두 가지 영적인 전통이 있습니다.
분도회의 정주영성과 프란치스코회를 중심으로 하는 탁발영성입니다.
정주영성의 정주定住란 말 그대로라면 내 좋을 대로 떠돌지 않고
정해진 곳에 머문다는 것이 1차적인 뜻이지만 단지 장소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좋을 대로 하지 않고 정해진 대로 한다는 정신입니다.
그래서 장소만이 아니라 시간도 규칙이 정한대로 철저히 따르고,
소임도 내가 하고 싶은 소임이 아니라 공동체가 정해주는 대로 맡고
성당이나 식당의 앉는 자리, 행렬순서 등 모든 것을 정해진 대로 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법과 규정을 하느님께서 주셨다고 믿듯이
모든 규정이나 명령이 장상이나 공동체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해주시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정주영성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알리는 종은 단지 시간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이기에 그렇게 믿는 사람은
즉시 자기가 하던 것을 중단하고 부르시는 주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또 장상이 소임을 정해주면 그것은 인간 누구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것이기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즉시 그 인사명령에 따라야 하고 끝까지 그 소임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주영성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 뜻에의 순종입니다.
그런데 만일 공동체와 개인 사이에서 하느님이 빠져있다면
법이나 규정이나 제도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자유를 억압하고 방해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탁발영성은 인간의 자유, 특히 성령의 자유를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법이나 규정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그런데 만일 성령의 이끄심에 자유롭게 따라야 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면 당연히 성령을 따르지 않겠지요.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할 것이고,
하느님보다 여자를 더 사랑하면 여자를 따를 것이며,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세상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사람, 특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법을 무시하거나 이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법을 폐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 특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법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말에 정말로 착한 사람을 일컬어 ‘저 사람은 법 없어도 돼!’라고 하는데
착한 사람도 법이 없어도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더더욱 법 없어도 되지요.
사랑은 법이 정하고 요구하는 것 이상을 하고자 할 것이기에
사랑은 법을 완성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순종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는 내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