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자비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그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지만,
누구는 그 자비가 필요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누구는 그 자비가 자신에게 마땅하지 않아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는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음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에
하느님의 힘이 필요 없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계셔야 하는 곳에
자신을 가져다 놓는 교만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없어도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에,
쏟아지는 그 엄청난 자비를
스스로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또 다른 안타까운 모습은,
그 자비가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너무 많기에,
받은 것에 비해서 내가 준 것이 너무 적기에,
또 다시 거져 받는다는 것이 부담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입니다.
어느 한 순간도 하느님의 자비가 없다면
숨을 이어갈 수 없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주고 받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흥정을 한다는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에 하느님 곁으로 갈 때까지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어찌보면 뻔뻔한 모습이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 잘못을 통해서 우리는
자비의 필요성을, 은총의 필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낄 때
다시 하느님께 되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렇기에 사순은 은총의 시기이며,
구원의 시기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