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여러 곳에서 간음과 우상 숭배를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호세야서는 우상 숭배를 간음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놓고 볼 때,
간음은 부부간의 순수한 관계를 깨뜨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느님과의 순수한 관계를 깨뜨린다는 의미도 그 안에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간음은 하느님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여자를 벌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것을 정당화 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에 따르면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생명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느님께서 벌하시기 이전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간음한 여자를 벌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율법에 따라 여자를 벌하면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모순이 생기며,
그렇다고 여자를 벌하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인간 관계에서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의 논리로 그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한 마음 속에 용서라는 마음은 자리잡기 힘듭니다.
하지만 성당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렇기에 용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막상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
용서라는 말은 어디에 갔는지 없고
분노와 미움 만이 다시 올라옵니다.
용서라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매번 느낍니다.
아니 결코 할 수 없는 어려운 숙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눈을 나에게로 돌린다면
나 또한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기보다는,
인간적인 나약함에 의해서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돌아온다면
그것을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십니다.
그 어떤 죄를 짓던지,
그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께 다시 돌아왔다는 것만이 중요하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무 조건 없이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를 받는 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온전히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는 못하지만,
나의 부족함을 용서 받는 만큼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끌어 안아 주는 것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과 자비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잘못, 나의 약함 속에서도
나를 지지해 주시고, 나를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볼 때,
그것을 채워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함도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잘못이 아무리 크더라도,
서로 용서가 아니라
서로 끌어 안아 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