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
하느님 말씀, 하느님 진리 안에서의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복음을 보면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말도 나오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래서 이 말씀과 오늘 주제를 묵상하다 문득 소신학교 때 생각이 났습니다.
시계가 없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모든 시간표는 종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종은 우리 교회 영성의 전통에서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였지요.
그래서 새벽 여섯 시에 종이 울리면 깨우시는 하느님의 소리,
여섯 시 반에 종이 울리면 기도하라고 성당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소리,
일곱 시 반에 울리면 밥 먹으라고 식당으로 부르시는 하느님 소리였지요.
그런데 시계 없이 이렇게 종소리에 의해 모든 시간표를 따라가는 것이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지요.
특히 기상 시간, 지금이나 그때나 저는 일찍 일어나는데 일찍 일어나도
일어나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였기에 누워 종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는데
멀뚱멀뚱 누워있는 그 시간이 너무 답답하고 어떨 때는 고문이었습니다.
소리에 예민한 저는 소리를 못 듣는 친구들을 깨우기 위한 화재경보음 같이
큰 기상 종소리에 깜짝 놀라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기도 하였지요.
고문에 가까운 것은 또 있었는데 미사 전 교장 신부님의 영적 훈화였습니다.
매일 같이 30 분 영적 훈화를 하시는데 노상 하시는 얘기를 듣고 또 듣고,
강론도 아닌 묵상을 눈 감으라고 하고 들려주시는데
늦잠 많은 친구들은 너무 이른 기상에 다 졸기에 지겨운 줄 모르지만
아침엔 정신이 말똥말똥한 저는 졸지도 못하고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지요.
그러다 소신학교 마치고 수도원 들어오니 아침을 기상음악으로 깨워주어
음악을 좋아하는 저는 마치 천상에 와 있는 것 같았고, 아침에 듣는
이 클래식 음악으로 저는 클래식을 배웠고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저희 수도원 아침 기상음악을 중요시 합니다.
그것은 집중하여 듣지 않아도 매일 듣는 거룩한 음악이
우리의 감성과 무의식을 자연스럽게 하느님 안에 잠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얘기를 제가 길게 얘기한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시간은 없고 하느님의 시간만 있고,
내 말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하느님 말씀만 듣는 그 지겹고 괴로운 것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하느님 안에 그리고 하느님 말씀 안에 잠기게 하여
비록 실천치는 못해도 하느님 말씀이 이젠 지겹거나 괴롭지 않게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싫건 좋건 하느님의 시간과 말씀 안에 오래 머물다보면
하느님 말씀이 점차 지겹지 않게는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 말씀이 내 안에 얼마나 자리 잡고 있느냐 그것입니다.
공자님 말씀에 나이 50에 지천명知天命, 60에 이순耳順하고,
70에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60살이면 하느님 말씀이 듣기 싫거나 거북하지 않아 온순히 듣게 되고
70살이면 나의 욕구와 마음이 하느님 말씀과 일치하기에
마음대로 해도 그 실천이 하느님 말씀에 어긋나지 않게 되어야 한다는 얘기지요.
이것이 바로 하느님 말씀 안에서의 자유요, 진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자유를 살고 있는지,
하느님 말씀이 나에게도 진리이고
나의 자유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인지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