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십자가의 길(Via Crucis : 1950)
작가 :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크기 : 잉크화 400 X 200 CM
소재지: 프랑스 방스 로자리오 경당 (La Chapelle du Rosarie des dominicaines de Vence)
십자가의 길 신심은 4세기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 열심한 신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흔적을 찾기 위해 예루살렘을 순례함으로 시작된 것이다.
12세기가 되면서 이 신심은 장소성을 강조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걸으셨던 흔적을 걸으며 기도하는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 the “Way of Sorrows)라는 위치가 정해졌으며, 이 길은 주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받으셨던 곳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타 언덕에서 끝내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해와 순교를 감내하면서 성지를 수호하고 있던 프란치스칸들이 바로 이 신심 정착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이어서 신심 행위는 전체 교회로 확산되어 많은 신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17세기 말 부터는 성당 안에서 바치는 형식으로 변했다. 그 후 오늘까지 대다수의 성당에 14처로 형성된 십자가의 길이 비치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십자가의 길 신심은 단순한 장소 확인 표식이 아닌 예술성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수난 고통에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전통적인 14처의 십자가의 길은 각처를 순례하면서 기도하는 신자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타로 여행하는 감회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대 작가들은 과거 작가들이 예수의 수난 현장으로 사람들을 초대한 것과는 반대로 예수의 수난의 의미성을 현실 안으로 끌어들여 오늘의 사건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작가는 20세기 프랑스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 회화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판화, 조각 분야에서도 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겼다. ‘색채의 마법사’로 통할 만큼 특히 푸른색을 사용하여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을 했다. 20세기 초반 야수파 운동을 주도하면서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해 유럽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작가는 태어날 때 여느 프랑스 사람처럼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지성적인 젊은이들이 제도적인 교회 구조와 성직자들에 대해 가졌던 반감으로 교회를 떠났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는 단호히 신앙을 버리고, 오랜 기간 동안 교회 예술에 대한 태도도 마치 동방 교회 일각에서 있었던 성상 파괴주의자처럼 무관심과 혐오의 태도로 살았다. 성상 파괴 운동이란 8~9세기 교황권을 거부하는 동방교회에서 성화상(이콘) 공경의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성상을 파괴한 운동이다.
그는 당시 여러 젊은 예술가들처럼 그리스도교가 복음과 거리가 먼 기득권자들과 유한계급들의 놀이터 역할을 하는 것을 격렬히 반대하면서 야수파(Fauvism) 태도를 취하다가 그의 나이 71살이 되던 1941년에 그의 신앙관이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가 말년에 병원에서 요양생활을 하면서 크리스천 신앙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간호사를 만나게 되고 딸 같은 처지의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 간호사가 도미니코 수녀원에 입회하면서 작크 마리에(Jacques Marie) 수녀가 되었다.
수녀가 된 후에도 둘 사이에는 부녀 같은 순수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유지했다. 이 수녀의 요청에 의해 수녀원 경당 건축에 관여하게 되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눈뜨게 되었고 이 공사에 전적으로 매달리면서 일생일대의 걸작을 남기게 된다. 쟉크 수녀는 교회에 대한 극도의 불신 상태에 있던 작가를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을 교회로 인도해서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로 변신케 한 하나니아스에 비길 수 있다.(사도 9장)
작가는 십자가의 길을 전통적으로 장소적인 거리를 두고 표현한 게 아니라 한 벽면에 접합해서 제작하면서 작가적인 특성을 제시했다.
1처부터 14처까지를 아래에서 부터 위로 올라가도록 배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오르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했다.
이것은 벨기에 안티워프(Antwerp)의 성모 대성당에 있는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작품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내리심”(Descendent from the cross: 1612- 1614)에서 암시를 받았다.
그는 이 대작을 완성하기 위해 불편한 노구를 끌고 최선을 다했다. 벽화를 제작하기 위해선 직접 오를 수 없으므로 긴 막대기에 붓을 달아 그림을 그렸다. 그는 마치 미켈란젤로가 생애 말년에 시스티나 경당에서 “최후의 심판”을 그린 것과 같은 열정으로 그렸다.
작가 말년에 어떤 사제에게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했다. “나는 이 십자가의 길이 전통적인 십자가의 길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실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나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4년 동안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며 이것은 내 예술 활동의 완성을 측정하는 기념비 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제작에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당시 여느 젊은 예술가처럼 교회에 대한 실망과 반감으로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도 예수님도 떠난 것이 아니고 제도로서의 교회, 예수의 모습과는 턱없이 다르게 보이는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작가는 쟉크 마리에 수녀를 통해 자비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바로 작가의 회심의 기억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린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나, 이 작품은 작가의 말년 작품이라는 것과 그의 회심에 대한 기념작이라는 면에서 이 세상이 매기는 그림 값과 전혀 다른 차원의 명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오늘 교회 개념으로는 냉담자나 무신론자에 속하는 작가가 신앙의 내용을 너무도 심원하고 이 시대 정서에 맞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공의회 문헌은 크리스천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실천적 무신론자와 익명의 크리스천이다. 실천적 무신론자란 하느님의 계속 외치고 가르치면서도 그 일상 삶 안에는 윤리적 차원만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별 차이 없이 살아가는 그런 크리스천을 말한다.
익명의 크리스천이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이 계시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며 작가의 범주는 바로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을 공적으로 거부하면서 일생을 살아온 작가가 남긴 이 작품은 제도적인 교회의 경직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종교가 주신 실망 속에서도 아름다움의 추구를 통해 너무도 하느님을 깊이 갈망하던 예술가가 자비롭고 맑은 모습의 하느님을 만난 신앙고백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손가락으로 주님의 십자가 상처를 확인한 사도 토마의 신앙 고백을 연상시킨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1,28)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 멀음을 쫓으시니,
향 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 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고백록10권 27장)
벨기에 안티워프(Antwerp)의 성모 대성당에 있는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작품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내리심”(Descendent from the cross: 1612- 1614)